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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1일 목요일

통일교의 분열 발제문 최종

2016.08.11. 14:53
1. 특이한 현상
통일교 창교자 타계를 전후하여 통일교 내에서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자칭 천일국 2대왕이라고 주장하며 유일한 대신자 상속자라고 주장하는 문형진은 자신의 친모를 타락한 해와, 바빌론의 음녀, 레즈비언으로 저주하고 있고, 창교자의 아내이자 참어머니인 한학자는 창교자의 정체성과 대립하는 새로운 정체성인 독생녀론을 교리화하고 있다. 문현진은 GPF와 FPA를 통해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신종교 창교자가 타계한 경우 그의 카리스마를 합리화하고 상당 기간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신종교 현상이지만 통일교의 경우는 매우 특이하며 극단적인 분열 양상이 관찰된다.
필자는 축복가정이자 종교학자로서 수년간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한 결과 분열의 원인이 창교자와 각 분열 주체간의 정체성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분열의 과정이 매우 비도덕적이고, 비원리적이며 파괴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 통일교의 정체성
통일교의 정체성인 신념체계와 의례체계는 창교자의 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 창교자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변화되는 과정이 곧 통일교 정체성의 변화과정이다. 창교자는 16세에 예수의 사명을 인계받은 후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든 활동을 집중하였다. 절대자 하나님의 혈통이 온전히 완성한 참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모델로 하여 세계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이 지상에 하나님의 혈통으로 모든 인류가 복귀된 하나님의 나라, 창조 이상세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원리원본의 탈고, 원리해설, 원리강론을 비롯하여 창교자에서 비롯된 모든 통일교의 교리와 의례는 바로 창교자의 종교적 정체성이자 종교적 이상인 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체성의 출발은 창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온전한 혈통을 이어받은 인류 최초의 유일한 인간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인류의 메시아 구세주 참부모라는 자의식이 형성되어 발전해 가는 과정에 신화와도 같은 사건이 있었지만, 창교자의 정체성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매우 이성적이었으며 논리적이었다.
창교자는 인류역사의 과정을 창조-타락-복귀의 삼단계로 인식했고, 현재 섭리의 책임자로서 현재를 복귀가 완성되어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성약시대, 후천시대, 지상천국 정착의 시기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여 자신의 가정인 참가정을 우선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최종 섭리적 사명을 완수하고자 했다.

3. 종교를 초월한 정체성
1935년 4월, 사명자 인식 후 창교자가 보여 준 모든 종교적 사건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하고 있었다. 절대자와 우주의 존재 법칙과 인간의 타락과 복귀의 방법에 대한 탐구, 절대자의 계시를 따라 처자식을 버리고 공산치하의 평양으로 들어간 사건, 상식을 넘는 혈통복귀의례를 실천한 사건, 공산당에 체포되어 흥남 감옥에서 생사를 넘는 사투를 벌이다 극적으로 탈출한 사건, 6.25 전쟁 중 부산에서 형편없는 토담집을 짓고 『원리원본』을 저술하며 인류 구원과 절대자 하나님 해방을 구상했던 일, 엘리트 제자들을 전도하여 1954년 5월 1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구세의 사명을 시작한 사실, 1960년 4월 11일, 딸 같은 한학자를 아내로 맞아 성혼식을 해야 했던 일, 36가정에서부터 시작한 집단적 혈통복귀의례가 3억6천만 쌍까지 확대되었고, 혈통복귀의례의 세계화, 대중화를 선언한 것 등, 창교자가 주관한 모든 사건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것은 바로 아담 해와가 타락으로 이루지 못했던 지상천국의 이상을 참가정을 통해 이루기 위함이었다. 절대자 하나님의 창조이상인 지상천국을 창교자가 완성한 아담의 입장에서 해와를 완성시켜 절대자를 부모로 모시는 복귀된 혈통의 참가정을 이루고, 이 참가정의 혈통을 만민에게 확대함으로써 지상천국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것은 통일교사의 처음과 끝이라 할 수 있다.
 창교자는 이 목적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1954년 5월 1일, 종교시대를 대표하여 창립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만 40년 만에 해체하고, 종교시대 이후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을 1994년 5월 1일에 창설하였다. 가정연합의 등장은 창교자의 혈통복귀를 위한 종교적 정체성이 초종교적으로 보편화하여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창교자는 가정연합 등장 이전의 시대를 종교시대, 가정연합 이후의 시대를 초종교시대로 인식하였다. 창교자는 이미 협회를 창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명자로 인식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종교적 사명은 특수한 교리로만 이해되는 특정 종파나 교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참가정의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것이었음을 일관되게 교시해 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창교자는 가정연합 창설과 함께 종교시대가 끝나고 본연의 아담 가정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어나가는 시대가 되었음을 선언하였다.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가정이 종교시대의 교회를 대신하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일상생활이 종교시대의 신앙생활을 대신하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종교가 본연의 세계를 찾기 위해 인간에게 제시했던 기도, 예배, 하나님 숭배 등과 같은 종교 행위는 근본적으로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일교 신앙자들은 종교시대의 졸업장을 받은 처지니 종교 행위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 자녀로의 삶과 실천에 집중해야 함을 창교자가 교시한 것이다.
가정연합시대 이후에 발견되는 창교자 교시 중에서 매우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양심의 가르침을 깨치고 그대로 살면 종교도 필요 없고, 창교자도 필요 없고, 참부모도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창교자의 이런 교시는 신종교 현상 중에서도 아주 드문 현상이다. 특정한 환경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창교자)에 의해 신종교가 발생하는데, 보통 창교자의 카리스마는 강화되어 합리화 과정을 거치다가 일상화 혹은 약해져 소멸하기도 하고, 신종교는 재활성화 과정을 거쳐 부흥의 길을 다시 모색하기도 한다. 그런데 통일교의 경우 얼핏 보면 창교자가 자신의 카리스마와 자신의 조직, 나아가 절대자의 초월성까지 철저히 해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창교자가 인식한 절대자의 창조목적 완성에서 비롯된 해체로 보아야 한다. 구세주, 메시아, 참부모 사명이 완수된 상태는 구세주, 메시아, 참부모가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숭배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절대자 하나님이 창교자의 깨달음과 혈통복귀의례를 통해 인간의 부모가 되었으니, 하나님은 숭배대상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시고 사는 부모로 재탄생 된다. 결국, 기존 종교가 숭배대상으로 가르친 그 하나님은 필요 없게 된다. 종교의 사명이 잃어버린 본래의 부모(절대자 하나님)를 찾게 하는 것이었고, 부모를 찾았으니 종교 또한 필요 없게 된다. 통일교 창교자는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인간의 실제 부모로서 인식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삶의 모든 형식을 기존 종교의 특수한 의례가 아닌 참사랑의 위하여 사는 삶으로 확대하고 일반화했다고 볼 수 있다.
가정연합을 통한 창교자의 종교 해체 작업은 창교자가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세상으로 선포하여 반드시 실현해야 했던 궁극의 진리를 통해 더 깊이 이해된다. 이 궁극의 진리는 창교자가 깨달아 교시한 모든 신념체계의 결론이며, 창교자가 이해한 절대자 하나님의 궁극의 꿈이었다.

2) 신념체계의 확정: <8대교재교본>과 궁극의 진리
창교자는 2010년 2월 19일, 『원리강론』, 615권의 『말씀선집』, 『천성경』, <가정맹세>, 『평화신경』, 『천국을 여는 문 참가정』, 『평화의 주인 혈통의 주인』, 그리고 『세계경전』을 통일교의 <8대교재교본>으로 공식 선포하였다.
주목할 부분은 창교자가 통일교 신념체계를 총망라한 <8대교재교본>을 창교자의 유언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인류에게 전달할 절대자의 모든 교시와 구원을 위한 천도(天道)가 <8대교재교본>에 포함되어 있으니 창교자는 이것을 읽고 공부하라고 교시하였다. 창교자가 가르칠 것이 더는 없고, 누구도 <8대교재교본>을 고칠 수 없다고 분명히 하면서, 통일교의 분열을 염려하기도 했다.
종교시대와 초종교시대를 통틀어 <8대교재교본>을 통해 교시하려던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창교자는 분명히 교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父子)의 관계라는 사실과 참사랑, 즉, 위하여 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진리는 창교자가 깨달아 전 인류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으로써, 인간의 가치와 인간이 실존하는 방법이고, 종교의 궁극적 목표와 이상이 실현되는 최종 방법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다.

3) 창교자의 사명 완수와 인류 해방일, 기원절 선포
한국 신종교 중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한 신종교는 거의 천년왕국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신종교가 기존의 사회질서나 기성종교의 역할에 대한 불만과 반작용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일부 신종교는 창교 초기에 기존의 사회질서나 기성종교와 긴장관계를형성하기도 하고,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그 종교적 신념이 현재의 질서를 부정하고 이상세계의 새 질서를 대망하는 급진적 천년왕국운동인 경우, 기존 사회질서와 충돌하거나 폭력적 혁명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그 추종자들이 창교자가 주장하는 신의 계시를 무조건 받아들인 나머지 재산을 팔아 헌납하기도 하고, 가정을 버리고 종교에 귀의하거나, 심지어 살인이나 자살까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하여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신종교는 사이비종교, 유사종교 등의 이름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한국 신종교의 특징이나 양상과 비교하여 통일교도 기본적으로 천년왕국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다른 천년왕국운동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① 통일교의 말세관은 급진적이거나 우주의 대파괴를 상정하지 않는다. 인간 책임을 통한 창조이상의 회복을 주장한다. 따라서 시한부 종말론과는 거리가 멀다. ② 창교자를 구세주, 메시아, 참부모로 믿어 종교적으로 높이 받들지만, 숭배를 교리화 하지는 않았다. ③ 구원의 완성은 창교자에서부터 비롯되나 인간 개개인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가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다. 창교자의 초자연적 능력이나 절대자에 의한 일방적 구원을 바라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④ 통일교가 말하는 후천시대는 인간책임을 통해 절대자의 창조이상이 실현되는 시대이다. ⑤ 지상천국은 한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모든 인류가 절대자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대가족 이상세계이다. ⑥ 신비체험이나 기적에 집착하는 신앙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사는 참사랑의 실천적 삶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긴다.
창교자는 2001년부터 자신의 종교적 사명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나라를 천주평화통일국(천일국)이라 명명하며, “절대자 하나님을 중심으로 쌍쌍이 하나 되고 영·육계가 일체를 이룬 아벨 왕권의 나라, 초종교·초국가·초인종·초NGO·초유엔 기반의 평화통일 이상천국이 바로 천일국”이라고 교시하였다. 2010년 2월 19일, 자신의 종교적 이상과 통일교의 목적, 그리고 절대자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천일국’이 2013년 음력 1월 23일 ‘기원절(基元節)’을 기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또, 모든 통일교인은 기원절에 천일국 실현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천일국은 천년왕국에 비유될 수 있고, 기원절은 선천시대가 끝나고 지상천국,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말세의 심판 날’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통일교의 천일국은 창교자나 절대자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원절도 통일교인들이 책임을 다해 천일국을 이루어야 하는 최종 시한인 셈이다. 만약 책임을 못한다면 2013년 음력 1월 13일은 천일국 없는 기원절이 되는 것이다.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는 기원절에 대한 창교자의 애착과 책임의식이 그의 자서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천일국이 통일교사 전체를 통해 창교자가 이루고자 했던 최종 목표이고, 기원절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문현진의 GPF 활동을 제외하면 이를 위한 통일교의 구체적인 활동이 전무 했고, 통일교 신학자들의 연구도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창교자가 실체 천일국과 기원절을 보지 못한 채 성화한 이유도 있겠지만, 대다수 통일교인은 창교자의 기원절과 천일국 선포를 늘 있었던 수많은 선포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이유도 있었다.

5. 창교자의 카리스마 전수 시도와 반발
신종교의 발생과 전개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고비는 예언의 실패나 노화로 창교자의 카리스마가 붕괴하거나 창교자의 카리스마를 정상적으로 전수하지 못한 채 창교자가 타계하는 경우에 일어난다. 특히 신종교 창교자 타계 후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심각도는 신종교가 창교자의 예언 능력이나 카리스마에 의존한 정도에 비례한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런데도 대다수 신종교는 창교자 노화나 타계 등으로부터 발생하는 여러 사태로 다소의 혼돈을 겪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나름의 정체성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적으로 카리스마 전수를 위한 후계자 논쟁의 후유증이 없거나 적은 신종교는 창교자 재세 시 후계자에 대한 기준을 교리나 교칙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비교적 합리적이고 원칙적으로 종교를 운용한 경우였다고 볼 수 있다.

1) 문현진의 등장: 카리스마 전수의 첫 시도
문현진의 등장 시점인 1998년 통일교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교자의 나이는 80을 바라보고 있었고, 한국의 IMF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통일교의 사업 기반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문효진의 가정이 깨지는 상황에서 홍난숙은 세상 앞에 참가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책을 출판한 상황이었다. 1998년 7월 19일 30세의 나이로 문현진은 가정연합 세계 부회장의 직함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당시 문현진을 창교자의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창교자의 뒤를 잇는 문현진의 등장은 통일교의 새로운 기회였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강력한 통일교 개혁을 예고하였다.
문현진의 정체성은 1998년부터 현재까지 일관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가 주장하는 4가지 질문과 초종교, 초종파적 지향성, 참가정과 1세대에 대해 강력한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요구했던 태도, 특히 참부모 신격화를 반대한 점 등에서 한학자, 문형진, 문국진 등과 확연히 구별된다.
그러나 문현진의 통일교 개혁작업은 1세대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미 세속화, 관료화되었던 통일교 1세대들은 문현진의 등장과 개혁을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창교자는 통일교의 모든 조직을 문현진에게 맡겼고, 문현진은 강력한 조직정비를 통해 리더쉽을 발휘하고자 했지만 1세대들은 문현진이 참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참부모라고 주장한다고 참소함으로써 창교자와 문현진을 이간질했다. 이것이 통일교 분열의 시작이다.

2) 문국진의 등장과 분열의 가시화
문국진이 2005년 1월 4일부터 실질적인 재단이사장의 역할을 시작했다. 1월 7일 창교자는 문현진은 서양, 문국진은 동양, 문형진은 종교권을 책임진다는 언급을 하였다. 자료를 통해 파악되는 사실은 문국진의 등장과 함께 통일교의 분열이 가시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문국진은 등장과 동시에 통일교를 강력하게 감사하며, 그것을 무기로 통일교 조직을 자신을 중심으로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더 많은 자료를 통해 확인해야 할 내용이지만 문국진은 재단의 중요 자산을 처분하고 자금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했다. 문국진의 자산 처분 과정을 포함하여 통일교 자산의 처분과 자금 흐름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확보한 후 이에 대한 단행본을 발간할 예정이다.
분열이 가시화한 것이 파크원 사태이다. 자료를 통해 파악되는 파크원 사태의 원인은 문현진을 제거하기 위해 벌린 문국진의 무모한 시도였고, 그 과정은 비도덕적, 비종교적, 비원리적이었으며, 그 결과는 창교자의 카리스마 붕괴, 참가정 파괴, 통일교의 실체 폭로였다. 특히 2006년 4월 23일 창교자가 참가정의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된 내용을 한학자와 문국진이 지키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사태는 통일교 분열을 가속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소송을 위해 투입한 돈과 통일교 피해액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언론은 수천억원에서 1조를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문국진의 통일교는 패소하였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오로지 문국진과 문형진을 앞세운 통일교는 단순히 문현진을 제거하기 위해 이 엄청난 일을 벌렸다.
파크원 소송이 시작됨과 동시에 통일교는 문현진을 타락한 아담, 아버지의 재산을 강탈한 패륜아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통일교인들과 세상에 널리 알렸다.

3) 문형진의 등장과 통일교 정체성 왜곡
문형진이 통일교사에 등장하게 된 배경에 문국진의 강력한 설득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문국진이 문형진의 하바드 신학대학원 졸업식에 찾아가 설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형진은 문국진이 실질적인 재단 이사장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휘두르던 2006년에 엄청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등장하였다. 종교학을 전공한 참자녀가 머리를 깍고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형진의 정체성은 2008년 4월 18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에 취임한 직후 그가 주도한 여러 의례인 심령치유예배, 칠사부활팔단완성, 천복식, 천복축제 등과 설교를 통해 확인되었다. 문형진이 보여준 그의 정체성은 통일교의 전통과 의례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고, 특히 참부모를 숭배함으로써 신격화한 것은 후에 한학자의 독생녀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가정연합을 통일교로 회귀시킴으로서 통일교의 섭리적 정체성을 성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볼 수 있다.

6. 카리스마 전수의 실패: 문현진 축출 과정(2006~2009.3)
2006년부터 시작한 파크원 사태에서부터 2009년 소위 영계 메시지 조작사건에 이르는 과정은 한 마디로 문현진을 축출하기 위해 참가정의 질서, 창교자의 섭리적 사명과 카리스마를 파괴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문현진이 GPF활동을 위해 세계를 순회하는 동안 문형진, 문국진, 한학자와 통일교 전체는 공모하여 창교자와 문현진을 이간질했고, 문현진의 이미지를 창교자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하는 천하의 패륜아로 만들어 통일교인들은 물론 전 세계에 선정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파크원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창교자의 진술서를 법원에 제출하였고, 창교자의 이미지를 아들과 재산 싸움을 하는 사이비 교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기간 통일교 분열의 성격이 폭로된 사건은 문인진 미국 총회장 임명 사건과 누군가 창교자의 혈통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사건, 그리고 속초 영계 메시지 사건으로 집약할 수 있다. 드러난 모든 자료와 관련자들의 증언, 서신, 이메일 등등을 통해 볼 때 2005년부터 미국 책임자로 세운 문현진을 제거하기 위해 문형진, 문국진, 한학자, 전 통일교 간부들은 창교자를 속이고 문인진을 미국 총회장으로 임명하였다. 2008년 8월, 문인진은 창교자가 세운 이사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교체해 버렸고, 이사를 원상 복귀해 놓으라는 창교자의 명령을 거부하던 중, 2009년 2월 26일, 속초에서 이를 원상회복하려는 문현진에게 문인진의 잘못을 뒤집어씌움으로써 창교자는 문현진을 완전히 불신하게 되었고, 결국 완전히 갈라서게 만들었다. 이는 속초 영계 메시지 사건으로 이어졌다. 김병화가 창교자와 김효율에게 보낸 서신들을 통해 반 문현진 세력이 문현진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있고, 이와는 반대로 문현진은 너무나 순진하게 그들에게 당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속초 영계 메시지 조작사건의 내막은 양창식이 김경효에게 고백함으로써 그 모든 내막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말해 김효율과 양창식 한학자가 문현진의 수족의 모가지를 자르고, 결국에는 문현진을 완전히 병신만들기 위해 만든 문건을 영계 메시지로 조작하여 창교자를 속인 사건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영계 메시지 조작사건이 비도덕적이고 비종교적인 것은 1년 전에 타계한 창교자의 장남 문효진을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문현진을 향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1년 동안 아버지와 같이 있으라는 명령을 어기고 뛰쳐나가 아버지가 일찍이 문현진에게 사명으로 준 GPF 활동을 계속했다고 천하의 죽일 놈으로 비난하고 있다.
창교자는 문현진에게 2009년 2월 27일부터 5월까지 ‘글로벌피스 투어’ 세계 순회를 지시하였다. 그런데 세계 순회를 시작한 지 불과 7일 만에 일방적으로 중시시키고 문현진을 불러 영계메시지를 읽으며, 그와 관련된 인사들의 모가지를 치고 문현진을 완전히 병신 만든 이유를 알아야 한다. 훗날 반문현진 세력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했다. “1) 문현진이 ‘참부모’을 제쳐놓고 자신을 참부모라 참칭 했다. 2) 문현진은 절대 성(性)에 흠(탈선)이 있다. 3) 문현진은 미국 이사회를 마음대로 주관했다. 4) 문현진의 GPF 활동은 정당성을 잃었다. 반역 활동이다. 5) 문현진이 참가정을 피눈물 흘리게 한 가해자이다”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침실 동영상, 창교자의 법정 진술서 그리고 속초 영계메시지 사건의 공통점은 이 사건들이 문현진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되었다는 사실이다. 창교자는 반 문현진 세력들에 의해 문현진 제거의 단순한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속초 영계 메시지 사건의 경우 창교자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2008년 3월 17일 타계한 문효진까지 이용했다.
모든 자료와 정황은 음모를 꾸민 세력의 부도덕성을 폭로한다. 장남 문효진의 타계를 가슴 아파했던 창교자의 심정조차 문현진 제거의 교묘한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 바로 속초 영계메시지 조작사건이었다. 참가정의 가치는 세속화되어 땅에 떨어졌고, 참부모의 권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7년부터 2009년 3월까지 통일교에서 벌어진 상황을 통해 1998년부터 문현진을 앞세운 통일교가 어떤 과정으로 문형진과 문국진의 통일교로 넘어가게 되었는지, 한학자를 중심한 ‘참가정’이 문현진을 왜 축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참가정의 배신과 음모, 어머니와 동생들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음해해 몰아낸 이 기막힌 사연은 한국의 아침 일일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참가정의 도덕성과 권위는 파괴되었다. 창교자가 세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고수해 온 참가정 이상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후 통일교는 문현진의 활동을 더 노골적으로 방해하면서, 그를 비난하는 특별 설교와 강연 그리고 언론 인터뷰를 이어갔다. 대중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참가정의 음모와 분열은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통일교가 참가정 운동으로 지상천국을 이룬다는 말은 세상이 다 아는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뿐만이 아니라 참가정의 분열과 통일교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앞으로 참가정과 통일교에 닥칠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 통일교의 극한 분열과 카리스마 몰락
문현진은 창교자와 참가정에 대한 기대를 2009년 중반까지는 버리지 않은 듯하다. 비록 통일교의 비난과 방해, GPF 활동을 멈추고 UCI를 내놓으라는 창교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문현진은 창교자가 자신에게 준 GPF 사명에 집중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통일교의 모든 상황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문현진이 보여준 태도는 객관적으로 볼 때 매우 안일했다. 문현진은 사태가 심각한 수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던 2009년 2월까지도 소위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학자를 중심으로 문형진, 문국진, 1세대 고위 지도자들이 통일교 장악을 위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응해온 태도와 대조된다.
1) 분열의 내막 (2009년 4월-2010년 6월)
이 기간에 두드러지는 분열 양상은 창교자와 한학자와의 본격적인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문현진을 타락한 아담, 재산을 훔쳐간 천하의 패륜아로 완전히 낙인을 찍으면서 문현진이 주관하고 있던 공적 자산을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
2) 덫에 걸린 문현진
2010년 5월 30일 브라질을 방문한 문현진은 신동모로부터 모욕을 당하게 된다. 브라질 협회를 방문한 문현진이 브라질 통일교인들 앞에 서지 못하도록 신동모는 성전에 드러누워 문현진을 모욕했다. 다음 날 새벽 문현진은 창교자의 지시와는 달리 브라질과 남미의 통일교 토지 문제 해결을 방해하던 신동모의 행위와 자신을 모욕한 행위에 대해 질타하면서 머리를 쥐어 박고 발로 신동모의 다리를 걷어찼다. 반문현진 세력들은 이 장면을 편집하여 창교자는 물론 전세계 통일교인들에게 문현진의 폭력성을 선전하였다. 파악되는 자료와 반문현진 세력들이 주고받은 이메일 등을 통해 문현진은 함정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이사건을 계기로 창교자와 문현진은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3) 창교자의 선포문과 카리스마의 몰락
2010년 6월 5일에 촬영되어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은 문형진, 이연아, 한학자가 창교자를 설득하여 상속자 대신자 사인을 받아 내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동영상이 제작되어 유포된 동기와 과정에 신동모가 김효율에게 요청한 “강력한 한방”이 있었고, 오로지 문현진을 통일교회사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참가정 전체와 통일교 전체가 동원되어 창교자를 속이고 통일교인들을 속였다. 이 동영상은 이단자 폭파자 선포문과 2011년 4월 참부모님 선포문과 함께 통일교 분열의 양상이 창교자의 카리스마 붕괴와 부자간의 재산싸움으로 변질되엇음을 폭로하였다.
이후 창교자 타계 직전까지 전 통일교와 참가정은 수많은 법적 소송과 문현진 비난 집회를 통해 문현진 죽이기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통일교의 공격에 대해 문현진을 지지하는 조직이 2010년을 전후로 조직되어 반 문현진 활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8. 통일교 창교자가 타계하다
2012년 7월 중순부터 창교자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그즈음 여러 증언과 자료를 종합할 때 그렇게도 이긴다고 했던 소송에서 패한 사실을 비롯하여 주변 인물들이 창교자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았을 것이다.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는 과정, 입원 사실을 문현진이 알게 되는 과정, 중환자실의 창교자를 문현진이 만나는 과정, 문현진과 문국진의 조우 등등의 과정에서 우리는 통일교 분열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더 비극적인 현상은 이후 문국진에 의해 폭로되는 창교자 안락사 의혹이다.
문형진의 주장에 의하면 창교자의 의식이 분명히 남아 있던 2009년 8월 말, 이미 한학자와 김효남은 창교자의 안락사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2012년 8월 31일 문형진과 문국진이 김효율을 대동하고 중환자실에서 창교자에게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안락사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창교자의 의식은 분명했고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창교자의 의식이 분명한 상황에서 안락사가 논의되었다는 점은 통일교 분열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변수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2012년 9월 3일 창교자는 안락사 당했다. 창교자의 타계와 함께 통일교의 신도들이 충격을 받은 비보는 참가정의 문인진에 대한 불륜과 사생아 출생에 관한 보도였다. 또한 문형진의 허위 학력 의혹 등이 여기 저기에서 터져나왔다.
통일교의 분열은 참가정의 분열이라는 등식이 명확한 상황에서 문현진을 유족명단에서 삭제하여 언론에 공지한 사실과 아버지를 찾아온 문현진을 돌려보내는 과정 등에서 통일교의 비도덕성이 또다시 폭로되었다. 창교자의 성화를 바라보는 문현진과 문형진의 관점은 통일교 분열의 내적 원인을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 창교자의 정체성에 대한 문현진과 문형진의 인식은 정확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

9. 한학자의 변심
창교자 타계 직후인 2012년 9월 17일 한학자의 공식적인 첫 연설에서 통일교 섭리를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대신자 상속자에 대한 언급이나 배려는 전혀 없었다.
자신을 중심한 통일교 섭리를 위해 한학자는 <8대교재교본>과 <가정맹세>, 그리고 창교자의 『말씀선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미 창교자 타계 전부터 작업을 이 작업은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경전에 손을 댄 목적은 한학자의 신격화와 창교자와 다른 한학자 중심의 정체성과 혈통신앙을 교리화하는 것이었고 결국 통일교를 한학자가 지배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연구하는 가운데 가장 충격받은 사실은 2012년 4월경, 한학자와 김효율이 성화사를 방문하여 가장 마지막에 발간한 594권-615권 『말씀선집』을 전량 회수하여 특정 부분을 삭제한 후 재발간토록 지시했고 실제로 성화사는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는 사실이다. 원본과 수정본을 비교해 보니 곽정환과 문현진의 이름이 거론된 부분과 한학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내용 상당 부분을 삭제하였다. 한학자의 이러한 시도는 문형진과 문국진을 내세워 문현진을 축출한 일, 문형진과 문국진을 다시 축출한 일, 창교자의 안락사, 독생녀 주장, 참가정이 배제된 법통 주장, 경전 수정 등의 일련의 사태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창교자의 성화식 과정에서 통일교 분열의 성격이 또다시 드러났다는 것과 창교자가 안락사 되었다는 사실이다. 참가정의 장자인 문현진과 그의 가족을 유족 명단에서 삭제하고 신문에 공고한 사실, 문현진을 성화식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한 사실,
문현진 죽이기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가 타계하는 과정에서 안락사라는 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안락사를 처음으로 폭로한 사람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통일교와 참가정은 이미 문현진을 통일교와 완전히 무관한 존재로 낙인을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문현진은 그들의 관점을 무시하고 참자녀로서의 행보를 계속했던

 

댓글 3개:

  1. 통론은 맞지만 각론에는 틀린 부분이 많네요. 나중에 세월이 지내면 밝혀지겠지요 그리고 현진님이 후계자가 되었더라면 모든게 잘 되었을까요? 너무 안일한 전제라고 봅니다. 전 아니라는 쪽에 한표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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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누워서 침을 뱉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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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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