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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8일 일요일

충성!!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충성!!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2013.08.17. 00:42 http://cafe.daum.net/W-CARPKorea/Umxh/3631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구원을 받은 줄은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매주 일요일 교회에 오면 지난주의 잘못을 회개하는 기도를 할 것인데 죄가 있어도 됩니까?
....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을 보니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군요.
 
기독교인들과 구원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되면 오로지 믿음으로만 인가 더하기 행위까지 인가가 추가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헌금들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통일교인들은 구원에 대한 논쟁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논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통일교인들은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가?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그들 못지않다는 것을 말 가운데서나 생활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버님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버님을 어떻게 대하는 것과 자신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주 밀접한 상관이 있다.
 
대부분의 식구들은 아버님을 인류의 참부모로 대하면서 축복을 통해서 자신을 거듭나게 하여 준 것으로 그것을 기성교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생명을 구원 받았으니 생명을 바쳐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거듭 남과 구원은 별개로서 그 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거듭 남이란 축복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사탄과의 혈통이 하나님의 혈통으로 바뀌어 졌다는 조건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그 조건은 어디까지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조건은 항상 ~~하면 이라는 약속이 성취될 때 비로소 그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다.
원리에서 말하는 그 조건을 성취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현재 살아 있는 통일교인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생전에 하나님처럼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되겠는가?
 
전에 어떤 사람이 천국을 가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죄 없는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인가 완성된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인가?
이 말은 죄 없는 사람이 구원 받는가 완성된 사람이 구원 받는가 하는 질문도 되는 것이다.
 
종교에서 규정하는 죄라면 이 세상에 살다가 간 사람이나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을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그 말은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구원의 개념을 지옥행을 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어느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기독교인들은 회개만 하면 죄를 사해주고 통일교인 들은 탕감조건을 세우면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한다.
말씀 어디에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왜 죄가 사해진다는 말이 있는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탕감조건을 세운다는 것은 죄가 사해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구원이나 인간의 완성, 그리고 탕감조건, 천국 죄....
아런 단어들은 관념적인 단어들로 측정이나 확인이 불가능한 단어들이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듣게 되면 솔직히 들을 때는 그럴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고 하여도 개성완성을 한 인간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을 것이다.
 
왜 지금까지 장황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가?
우리가 아버님 곧 참부모님을 자신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충성과 효도를 부르짖으며 참부모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신 분에게 충성과 효도는 사실 불가능하지만 돌아가신 참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충성과 효도를 다하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가?
자신의 원죄를 청산해 주었고 자신을 구원해 주었으며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인가?
참부모님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은 모든 것이 조건적인 것이며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해야 그 조건이 성취되는 것이며 실제로 살아생전에 그 조건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충성과 효도를 각오한다는 것은 너무 과한 맹세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기까지 육신의 부모에게 신세를 진 것을 생각하면 정말 목숨을 걸고 충성을 맹세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선배로부터 목숨을 구원받거나 인생을 구원받은 일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에게나 다른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지는 않는다.
 
왜 우리는 아버님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 부분을 명확하게 분석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맹목적인 충성과 효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차 이야기 하였지만 아버님은 인류의 참부모로서 구주(救主)의 사명과 예수님이 맨 처음에 말씀하셨던 천국을 건설해야 하는 섭리의 책임자의 사명을 가진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님을 대할 때 구주로 대하는 부분과 섭리의 중심인물로 대하는 구분이 명확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임금이라면 그 아들은 육신의 아버지로 대할 때와 나라를 책임진 왕의 신하로 대할 때가 구분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효도는 부자간의 관계에서 사용되어지는 말로서 목숨을 바쳐서 효도는 할 수가 없다. 세상에 어느 부모도 자식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효도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신하의 관계가 되어 버리면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해야 하는 관계로 되는 것이다.
 
백성이나 자녀가 충성을 하는 것은 국가의 운명을 책임진 왕이기 때문에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왕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목숨을 바친다면 왕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약 왕이 죽었다면 죽은 왕에게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 이미 그는 국가를 책임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식구들이 아버님에게 충성을 하는 이유는 아버님이 자신을 축복시켜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님이 섭리의 중심인물로서 섭리를 책임을 졌기 때문에 충성을 하는 것이다.
아버님에게 충성을 하는 것은 곧 섭리 앞에 충성을 하기 위한 것이지 아버님 개인에게 충성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충성의 최종 대상은 섭리가 되는 것이며 아버님이 충성의 최종 대상은 아닌 것이다.
 
지금 아버님이 성화하신지 1년이 되어 가는 지금 식구들은 아직도 아버님을 섭리를 책임진 책임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심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제 아버님은 섭리와 상관이 없는 자리에 계시는 분이다.
만약 아버님이 영계에서 섭리를 주관하고 계신다고 하면 참으로 할 말이 없겠지만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하면 아버님은 이제 섭리의 중심인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충성을 바칠 수도 없거니와 충성을 바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아버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을 하지 않으면 신앙인도 아니고 섭리인도 아닌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버님을 영적인 부모로 생각하여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목숨을 바쳐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섭리에 대해서이다.
 
섭리의 책임자는 아버님일 수도 있고 어머님일 수도 있으며 참자녀일 수도 있고 똫 다른 누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해야 할 대상은 섭리가 되는 것이지 아버님이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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