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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3일 목요일

하나님(神)이 계심을 누가 부정하랴? 그러나 종교가 설명하는 신은 너무 유치하다.|

 
  
누가 신이 계심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신이 계심을 부정할 수가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떤 지적인 존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부(陳腐)한 예(例)이지만 우리의 눈을 보더라도 그 복잡한 메카니즘을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눈의 초점을 통과한 빛이 망막에 상을 맺고 그 망막에 맺힌 상은 전기 신호로 바뀌어 시신경을 통해서 시각 신호를 관장하는 뇌 부위로 들어가서 전기신호를 다시 빛 신호로 바뀌어서 사물을 인식하도록 되어 있다.
 
이와 완전히 같은 원리가 디지털카메라이다. 디지털카메라는 렌즈를 통과한 빛이 화소판에 전기신호로 바뀌어서 메모리카드에 저장되었다가 다시 그 전기신호를 빛으로 변환시켜서 사진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필름카메라가 스스로 진화를 해서 디지털카메라가 될 수 없듯이 동물들의 눈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눈이 만들어질 때 단세포동물은 빛의 존재여부만 감지를 하다가 생물이 진화하면서 눈도 같이 진화하게 되어서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이니 눈이 스스로 진화를 했다고 하는 것은 디지털카메라가 저절로 성능도 좋아지고 화소도 많아졌다고 하는 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신의 모습이 어떤지 어떤 방법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왔는지 그 것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신의 모습이나 속성과 능력 등에 대해서 온갖 유추를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많은 종교들과 이론들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누가 신에 대해서 온전한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의 인간의 지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판단을 하고 유추를 하게 되는데 신에 대한 유추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지성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의 창조주에 대해서 유추한 내용과 인간의 지성이 발전하면서 유추하는 신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지성의 발달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 곧 창조주 곧 성서를 중심으로 설명되는 하나님은 4천 년
전의 유대민족의 민족 신의 범위에 머물던 신이다.
그 때는 인권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만인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개념도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종이나 노예 같은 계급도 성서 안에서 허용되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던 시대이다.
따라서 신도 나와 우리에게는 관대하고 나나 우리를 편애하고 나나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상대방에게는 관대할 필요도 없고 자비스러울 필요도 없는 하나님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 당연한 신관이었었다.
 
솔직히 구약에서 설명하는 신의 개념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의 개념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신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들을 보면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수 있는 내용들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신의 이름을 빌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로마 신화이다.
 
인간의 질투나 호기심 등은 사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생겨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신화에서는 그것을 신들과 신들 인간들과 신들의 관계에서 설명을 하고 호기심에 대해서도 판도라의 상자 등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올림푸스 산에 제우스와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고 살았던 때는 그들 신을 위한 신전을 세웠고 생활 가운데서 그들의 신에게 소원을 빌어서 힘을 얻어서 목적을 달성하였던 시대가 있었다.
그 때는 그들 지식의 범위 안에서의 세계관이고 신관이기 때문에 제우스를 하나님처럼 받들어 모신 것이다.
그 때는 제우스가 하나님이었지만 지금의 제우스는 신화 속의 신일뿐이다.
 
그러면 구약 속에 등장하는 그 하나님은 어떤가?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서 우리나라의 단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자신들이 천손(天孫)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민족이 없다.
 
신약에서 설명되어지는 하나님 곧 창조주 구약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창세기의 내용을 그대로 승계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간이 900살을 살겠는가...
인류학적으로 볼 때 옛날에 인간들의 수명은 지극히 짧았다.
의약품이나 의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질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고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망원인의 첫 번째가 굶어죽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의 90% 이상이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정말 에덴동산 같은 곳이 있어서 무병장수하는 곳이 있다고 믿는다면 아담이 900살을 살았던 것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에 그런 곳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따라서 그런 곳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현대를 살아가기에는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이론이 인간이 타락했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이상적(理想的)인 인간의 상(像)과 현실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다른 것에 대한 괴리(乖離)를 타락이라는 이론을 끌어 들여서 이상적인 인간과 현실적인 인간을 설명하고자 했었는데 당연히 그것이 맞을 리가 없는 것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지식이 발달한 시대에 현대의 지식을 섭렵한 사람이 성서를 편찬하였다면
창조주와 인간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생명이 어떻게 진화해서 현재까지 발전해 왔는지 그 메카니즘을 알게 된다면 성서의 내용과 같이 신을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을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며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지금처럼 설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은 것은 본래부터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현재처럼 살아가는 것은 그렇기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신이 존재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이 필요하며 그 것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은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느끼고 유발되는 모든 감정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질투심, 호기심, 성욕, 수면욕, 식욕, 소유욕 등 등...
소위 종교에서 죄로 규정하는 것들이 대부분들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이며 그 본성이 발로되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 다른 국가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 지성으로 그것을 잘 조절면 되는 것이지 죄로 규정해서 매도할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다가 보니 신을 설명할 때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대입해서 신을 설명하고자 하다가 보니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변하고 유일무이하며 등등의 수식어가 붙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지금 성서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현대에서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것은 세계관이나 신관이 그리스로마 신화 수준의 구약에서의 하나님을 그대로 계승해서 그대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올림푸스 산에 신들이 산다고 믿으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는가?
 
앞으로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사자는 사슴을 잡아 먹어야 살아갈 수 있고 소는 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본성과 연관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상천국이나 용화세계는 이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며 현실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갖 수식어로 장식되는 신 또한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수많았던 도인들과 종교의 창시자들...
나름대로 신을 설명하고 신의 모습을 닮기를 원하고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결과들을 보면 이상론자로 과대망상에 사로잡혀서 세상을 어지럽힌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우리의 주변을 보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떤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현재 인간의 능력으로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서를 중심하고 신이 어떻고 인간이 어떻고 하는 것은 분명히 틀린 것이며 사실 관심을 가질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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