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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7일 화요일

이렇게 살지는 말아야...하나님이 꽝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렇게 살지는 말아야...하나님이 꽝으로 생각하는 사람


2013.09.17. 00:31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2261

0(영)이라는 숫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숫자가 아니다.
0 이라는 숫자는 6세기 경 인도에서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빈자리를 표시하는 기호였으나 나중에 숫자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하며, 음수(-)도 3세기경에 발견되었지만 우리가 쓰는 숫자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진지는 30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영이나 음수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숫자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0 이나 음수가 숫자로 받아들여지고 그 개념이 이해되기까지는 천년이라는 세월이 넘게 걸린 셈이다.
사람들이 0 이나 음수를 숫자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가상의 숫자이니 그것이 이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설명하라고 하면 누가 쉽게 설명을 하겠는가?
이런 숫자들은 인간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숫자들이만 일상생활에서도 그 숫자를 많이 사용하다가가 보니 그 숫자가 실지로 존재하는 숫자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 실지로 존재하지도 않는 숫자도 만들어 내고 이론도 만들어 낸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이론 중에 가장 획기적인 이론이 신학이론일 것이다.
인간이 타락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검증도 없이 타락한 것으로 간주를 하고 이론을 전개해 나간 것이 소위 신학이론이다.
 
인간이 타락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만약 타락을 했다면 어떻게 타락을 했는지에 대한 검증도 없이 성서에 기록된 것을 사실이라고 하고 만들어나간 이론이기 때문에 그 이론에 어떤 과학성이나 정당성 합리성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런 이론은 일단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특징으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현실로 가정하여 만들어진 이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실수(實數)만으로 사칙연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음수, 허수, 무리수, 유리수 등 등....우리가 실생활에서 보지 않은 이론상으로 존재하는 수들로서 사칙연산들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학도 이와 같이 실재하지 않은 내용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이론이니 이해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론 강의를 들을 때나 강의를 할 때 가상의 에덴동산을 그려 놓고 거기에 하나님과 사탄, 아담과 해와 네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하면 강의를 듣는 사람은 정말로 에덴동산에 네 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 에덴동산이 그렇게 있을 리가 없다.
 
당초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도 우리가 타락론 강의를 할 때 에덴동산을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에덴동산을 상상하여 기록한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로 에덴동산이 있으며 거기에는 아담과 해와가 있었고 하나님과 사탄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원리에서 성장기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소생기 장성기 완성기로 구분하고 영형체급 영인체, 생명체급 영인체, 생령체급 영인체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 우리는 정말로 영혼이 그렇게 정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재로 그렇게 구분이 될 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강의를 많이 듣다가 보면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정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형체급 영인체는 구약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의 영인체이고, 생명체급 영인체는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인체이며, 생령체급 영인체는 성약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 곧 통일교인들의 영인체가 되는 셈이다.
우리 주변의 면면을 둘러 볼 때 생령체급 영인체를 가지고 있다고 볼 만한 사람들이 있는가?
우리 주변에 보면 교회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심정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는 원리강론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현실세계에서도 존재하고 통용되는 단어들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통용되지도 않는 단어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런 단어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수학에서 등장하는 0이나 음수 허수 등과 같은 존재하지 않는 숫자들이지만 수학에는 필요한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섭리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당신은 영형체급 영인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형체급 영계를 갈 것이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생명체급 영인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으면 낙원에 갈 것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 내용인 것이다.
 
우리는 아버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진리고 생명이며 하늘의 법이라고 생각하며 무조건 그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아버님 말씀 중에도 현실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말씀도 많고 현실과 상치(相峙)되는 내용도 많은 것은 어떤 내용 설명하기 위해서, 또는 어떤 원칙을 알려주기 위해서 설명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국경을 철폐해야한다는 것이나 한일 해저터널을 뚫어야 한다는 것 등 등은 당장 실현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국경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이웃나라의 국민들 모두가 부처님 가운데토막처럼 되어 있어야 하고 경제적인 수준도 평등해야 하며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완전히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 등은 인간이 본래 국경이 없이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것이지 실지로 국경을 철폐하실 것을 바라고 하신 말씀은 아닌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국경철폐는 수학에서 음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인 것이다.
 
우리는 원리강론은 무조건 일점일획도 다르게 해석해서는 안되고 아버님의 말씀도 단어 그대로 해석을 해서 실생활에서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 곧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 생각을 유연하게 가지지 않으면 본인의 신앙생활은 고달프기만 하고 결국은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 이 카페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는데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반경은 통일교를 벋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는 분명히 닫혀 있을 것이니 세상과도 소통이 불가능할 것이고 가족과도 소통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원리와 아버님의 말씀만 보지 말고 세상과 비교를 해 보아야 할 것이며 세상의 현실과 원리의 내용이 다를 때 무조건 세상이 틀렸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의 현실이 원리의 내용과 다를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 그 이유까지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 비난을 해야 할 것이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원리원칙대로 산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은 소위 인 사람이다.
 

 
05:56 new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소견을 보태자면,

수학적 명제나 과학적 이론은 처음에는 모두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가정'이 실험을 통해 '증명'이 된 이론을 '진리' '원리' 또는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신학이나 역술도 상당히 과학적인 학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신현준님께서도 어느정도 받아들이시길 기대합니다) 예를들어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실제 그것이 존재했느냐는 문제를 떠나서 (허수의 존재여부와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갖고 우리 인간 사회의 많은 현상들을 설명 가능하기 때문에 수천년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05:58 new
그러나 인류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어떠한 것도 그것을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입자 물리학에서 양자 물리학으로, 창조설에서 진화론으로 다시 창조적 진화론으로, 고전 경제학 이론에서 케인스의 혁명이 등장하는 등 한 때 대세로 받아들여졌던 '진리'들은 끊임없이 새로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반면,
양자 물리학은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대부분의 자연 현상들은 여전히 입자 물리학으로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처럼 에덴 동산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복잡한 인간사회의 현상을 단순화시켜 효과적으로 설명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인용되는 지존
 
06:02 new
의 위치를 확보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가설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 해석을 더해가면서 그 부동의 위치를 지켜갈 것입니다.. (신현준님께서도 그건 잘 알고 계시자나요?)

저는 신현준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설의 허구성, 즉 한계를 지적하고 강조하는 것은 문자주의적 해석에 빠져 여전히 불안한 가설을 근거로한 신학적 이론을 과신하는 일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그 한계는 사실 종교성을 강조하는 신도분들도 아는 거자나요?)

제가 보기엔 양측의 의견은 반이 채워진 잔을 놓고 반이 찼다는 주장과 반이 비었다는 주장의 대결 같습니다만....


제가 신현준님의 의견쪽에 더
 
06:02 new
공감 (쬐끔 더)이 가는 이유는 지금의 우리교회가 이대로 가면 안되고 반드시 개혁 (완전히)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투철한 섭리관 (올바른 성약시대의 신앙)을 부여받고 과학적인 원리를 배웠으며 실질적인 세상복귀 (영육 양면의)를 해왔던 우리교회가 미신적인 사이비종교로 변질되고 사랑이 메말라 가는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신현준님만큼은 못하겠지만 여러 믿음의 자녀를 전도한 한 사람으로서 많이 변질되어버린 현 교회의 모습에 속이 끓어오릅니다.
 
13:40 new
^&^
 
 
09:22 new
결국 인간의 이성이 발달되면서 기존의 과학이론이 보완수정되는 것처럼 신학에 대한 이론도 그렇게 수정보완 발전이 되어야 하는데 고정을 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신학이론이 나름대로 그렇게 결정할 때는 그 것이 최선의 결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나 지금은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며 그 때의 하나님을 이해하던 인간의 지성과 현대인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지성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창조주)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신을 부정하면 존재자체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직 인간의 지성이 그 신을 이해사기는
 
09:28 new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몇천 년 전에 규정한 하나님을 지금까지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동설에 대한 언급을 하였던 것처럼 그 때는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지성의 한계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처럼 그런 하나님으로밖에 이핼 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만 지금도 그 때의 한나님을 그대로 강요하는 것은 천동설을 믿으라는 것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하나님은 우주와 우주의 역사를 다 포함해서 설명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예외가 될 수가 없는 것이 60여년이 지난 지금에와서 그 때 그 상황의 상황에 맞는 내용의 말씀을 현재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09:36 new
한다는 것은 억지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가 존재하는 목적은 인간의 지성과 영성을 개발하는 것이 근본목적일 것입니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는 하나님도 알 수가 없고 섭리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니....

성서가 존재하는 목적도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도 메시아가 온 목적도 통일교회가 존재하는 목적도 축복가정이 존재하는 목적도 결국 종교가 존재하게 된 근본목적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근본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면 이상한 이론을 만들어서 광신의 길로 가거나 은둔의 길로 가거나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로 전락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 가고..,,

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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