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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악을 좌시하는 복종? 선을 이루기 위한 불복종!

악을 좌시하는 복종? 선을 이루기 위한 불복종!
 


축복가정이라면 참가정이 모두가 하나되어 화해와 일치 속에 기원절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합심해서 천일국 창건을 위해 달려가고 있을 미래의 모습을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겨울의 동장군에 얼어 붙은 산천의 눈과 얼음이 따뜻한 봄바람에 모두 녹아내리고, 푸르른 새싹이 온 들녁에 돋아 나듯이 그렇게 자연의 섭리처럼 통일가에도 새 봄이 왔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섭리사는 대자연의 섭리와는 다른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절기와 때에 따라 순환한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진행된다. 그러나 섭리는 하늘의 시대경륜과 인간의 책임분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분담에 의해 역사가 발전하고 전진할 수 도 있고, 퇴보하고 정체될 수 도 있는 것이다. 참아버님께서는 그러한 점에서 역사의 주체로서 인간의 사명과 역할을 명확히 하고자 하셨다.
 
따라서 참아버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존재론적 권위를 앞세우고 자신을 만인들의 숭모와 신앙의 대상의 자리에 세워놓고 시간의 흐름속에 섭리를 맞긴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책임의식을 가지고 천일국창건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살아오셨다. 참아버님의 메시아 의식은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자!'는 자발적 주체의식에 입각한 실천의식이었다.
참아버님이 가르쳐주신 신앙은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인 '신비로운 것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정맹세 1절부터 8절까지의 구절 구절 모두는 책임과 사명에 대한 스스로의 선언이다. 그 선언은 참아버님 스스로의 다짐과 고백이었고, 그것은 전 축복가정과 인류가 따라야 할 모델적 사명선언문인 것이다.
 
천일국 기원절은 우리가 천일국에 들어가는 날이 아니다. 가정맹세문의 구절구절 마다 못을 박고 있듯이 우리는 이미 "천일국 주인"이다. 그 자격은 진작에 주어진 것이고, 그 누구도 박탈할 수 없다. 천일국 주인이라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본향땅을 찾아 본연의 창조이상인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창건할 것을 맹세하나이다"의 사명을 실천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길에 조그마한 장애물이 등장을 했다. 우리는 그 장애물을 국복하고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장애물을 우리 손으로 직접 치우고 거두어 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그 정도는 수고스럽더라도 우리가 해야만 한다. 그리고 충분히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수고스러운 일을 하지 말자는 일체의 비원리적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
 
주구장창 현진님을 거짓으로 모함해서 내쫓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현진님이 '백의종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들이 거짓으로 모함해서 현진님을 곤경에 빠뜨린 사실을 스스로 인정도 하지 않지만,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진님의 불복의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온갖 비유와 잡다한 사례들을 그러한 불의한 논리를 정당화 하는데 사용한다.
이러한 논리의 함정에 빠져 '현진님만 돌아오면' 영계가 역사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순수한 신앙의 정도(?)를 주장하는 소리도 있다. 결국 거짓으로 모함 받고 이를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한 현진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거짓으로 모함 받은 것은 분명히 아는데, 이를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잘못된 섭리노선으로 가고, 반면 현진님의 노선이 섭리에 맞더라도, 억울함을 참지 못했기 때문에 참사랑의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 어처구니 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결국 현진님이 모함을 당했든 뭐가 되었든 따질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현진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 통일가 문제의 핵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데 있다. 복종과 불복종의 프레임으로 거짓과 음모를 덮으려는 교활한 술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원리는 인류역사를 '선악의 투쟁사'라고 정의하고 있다. 복귀섭리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악의 등장을 좌시하는 것은 복귀섭리를 망치고 연장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선약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 하늘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진리를 시대마다 계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해서는 선악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리강론은 총서론에서 부터 인간이 행복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영육 아울러 무지의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종교와 과학이 등장하여 내외적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사명을 해왔고, 이제 종교와 과학을 통일할 수 있는 새 진리가 등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새 진리는 죄의 뿌리는 물론 타락의 동기와 경로를 명확하게 밝힘으로 인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고 악을 발본색원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통일가의 혼란은 악과 거짓의 등장으로 부터이다. 악과 거짓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복종만 하면 하늘이 모든 악을 처결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원리를 모르거나, 현실을 너무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복종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식구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그대들은 이제까지 거짓에도 복종을 했는가?"
"우리가 참부모님을 따라온 신앙이 맹종이었나? 선악은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대상에 따라 복종도 할 수 있고 불복종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복종이 하나님의 섭리를 발전시킨 일은 얼마든지 있다. 선을 위한 불복종은 거룩하고 위대한 것이다. 반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복종하는 것을 우리는 맹종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맹종적 신앙을 순수한 신앙으로 평가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맹종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신앙행위이다. 모든 책임은 명령을 내린 사람에게 있지 본인에게 없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하면 정의이고 옳다고 하는 것은 노예론적 윤리관이다. 새진리를 따르는 천일국 주인의 윤리관이 될 수 없다.
 
순종 앞에 사탄이 물러가는 것은 선에 대한 복종이 이루어 졌을 때의 일이다. 선을 이루기 위해 자기희생적 순종을 하게 될 때, 제물적인 조건을 통해 하늘이 섭리가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지, 맹목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원리는 분명히 선악을 분별하는 도구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원리라면, 원리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원리는 충분히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원칙과 가치기준, 그리고 통찰력을 제공한다. 거짓보고와 음해를 원리는 용납하지 않으며, 이의 결과물은 악이다. 악은 반드시 발본색원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참가정 내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참가정을 악과 거짓이 이끌고 가고 있다면 이를 어찌 참가정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4대심정권과 3대왕권을 악과 거짓 위에 세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악과 거짓은 진실의 빛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는 우리 눈 앞의 악과 거짓을 진실의 빛 앞에서 벌거벗겨야 한다. 그것이 악과 거짓을 청산하는 일이다. 그래서 아는 자들의 침묵이 문제라는 것이다. 알면서도 침묵하는 통일가의 지도자들이 섭리를 가로막는 제2의 원흉인 것이다.
 
2009년 속초 천정원에서 거짓 영계메시지를 작성했던 인물이 한국의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침묵하고 있는 통일가의 지도자들과 식구들이 과연 누구의 불복종을 문제 삼고 있는가?
 
나는 모든 식구들이 통일가에 드리워진 악과 거짓의 정체를 파악하는 기원절을 맞이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선과 진실과 정의의 토대 위해 천일국이 출발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천일국이라면 처음은 비록 미약하나 나중엔 분명 창대해 질 것이다.
 
<새벽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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