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위한 변명
(연진님 정진님 결혼에 대한 의견)
교회의 관리 시스템에 대하여 한마디 하고자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회의 목회자 및 교인 감시시스템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현재 진행 중인 우리의 현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앙을 하면서 십일조를 하고 감사헌금을 하고 주일헌금을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해 왔던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명목이야 무슨 이름을 쓰더라도 모든 헌금은 감사헌금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않은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고, 불만스런 마음으로 감사헌금을 하고, 눈치 보느라고 건축헌금을 하고, 빈손이 쑥스러워서 주일헌금을 한다면 교회재정에 도움이야 되겠지만 무슨 정성이 되겠습니까.
교인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학생이 학교에 결석하지 않기 위해 가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간다면, 교인 숫자야 채우겠지만 하늘이 기뻐하는 발걸음은 아닐 것입니다. 뭐든지 기쁘고 감사할 때 살아갈 맛이 날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교인들은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실까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회를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은혜로운 설교를 찾기보다는 상부의 지시대로 예배순서까지도 획일화된 불안한 음성으로 설교를 합니다. 싸움터에 나가는 군졸들에게 살아남기 위한 지침서를 전하듯이 우리가 살길은 이것이라고 외칩니다. 많은 동료들이 느끼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쩌다 교인들 눈치나 살피며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나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는 다분히 유물론적 방법론으로 목회자를 관리하고 교인을 감독하는 조직이 되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조지오웰」의 ‘빅브라더’가 우리 교회에서 ‘스몰브라더’로 환생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군주사회, 그리고 그것을 감시하는 ‘빅브라더’의 환생이 지금 우리 교회와 교인들을 관리․감독하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사망한지 60년이 훨씬 지났고, 『동물농장』과 『1984』년이란 책이 출간된 지 70년이 되었건만, 우리는 그의 예언대로 감시받고 감시하는 사회를 이루어놓고야 말았습니다.
교인의 자격은 헌금을 한 사람만이 있다고 법령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몇 년 전, 식구들이 투표를 하여 교구장을 선출 할 때가 있었습니다. 선거권을 십일조를 내는 식구로 한정한다고 하여, 협회에서 투표권이 있는 식구 명단을 교회로 내려 보낸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말도 일견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국가도 세금을 내야 국민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교회도 헌금을 하지 않는 교인들은 교회의 의결권이 없다면서 왕따를 시킵니다.
또한 학교나 회사 출결상황을 점검하듯이 일요일에는 예배당 입구에 출석부를 비치하여 출석체크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인들의 급수를 메깁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급수가 정해집니다. A, B, C....... 급으로 메겨서 협회에서 관리를 합니다. 가난한 자는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매번 버림받은 인생이 되는 것이지요. 가난한 자가 교회에 다니며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보다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하는 축복도 돈 없는 자는 1세든 2세든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구원해 준다고 해놓고서 구원받고자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살장에서 소나 돼지를 등급을 정하는 것처럼 치부하고 있다는데 분노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인들만 등급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관리하는 목회자들도 급수가 정해지는 것을 봅니다. 회사에서부터 시작된 성과지표가 교회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K.P.I라는 것입니다. K.P.I는 ‘Key Performance Indicator’의 약자로서 ‘핵심성과지표’라고 한답니다. 어떤 계획이나 목표가 성공하였는지 또는 성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그 성공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측정하는 지표를 찾아 측정하여야 하는데, 이들 지표 중 성공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지표를 K.P.I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분명 직장에서 성과지상주의가 만들어낸 계측장치로 제품이나 조직의 리스크를 줄이고, 성장내지는 발전을 하기위한 제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직장성과지표가 신앙하는 종교로 도입되어서 헌금이나 교인증가운동에 쓰여 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황금만능주의가 가지고 온 아주 나쁜 폐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주처럼 섬기며 그 잣대로 현장의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을 체크하는 아주 나쁜 중앙집권조직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속화된 종교의 가장 저급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특히나 민주주의가 덜 발달된 신앙단체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중의 하나가 위에서는 숫자놀음이 가장 편리한 방법입니다. 신앙단체가 인격의 도야나 참된 인간의 가치추구에 목적을 두지 않고, 자신들의 성과지표로 현장을 관리 감독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밑에서도 숫자를 조작하고, 위에서도 조작된 숫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으로 현장을 체크합니다. 그리고 독려의 차원에서 서열을 정하고 상금을 줍니다. 그러다보니 숫자조작을 잘 하는 사람인줄 알면서도 상금을 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진정한 목회자들은 점점 회의에 빠지게 만드는 엉터리 같은 종교조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란 모름지기 도덕적 정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하는 사람들은 거짓말 하지 말고 참되게 살자고 모였는데, 그것을 관리 감독하는 상부기관이나 지도자들이 거짓보고에 능통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이 대우받는 단체라면 이미 부패의 도가 넘쳐서 존재의 정당성을 잃어버린 조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회구원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앞가림도 못하는 우매한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지금 도처에 그런 사이비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가장 우선하는 종교조직들이 어디냐 하면 사이비로 몰림 받던 신흥종교운동이 소멸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들입니다.
기존의 세력들과 전쟁을 하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하고 자신들의 도덕성으로 단체를 관리하기가 힘드니까 자꾸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잘 관리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조직관리란 이름으로 신앙단체를 이끌어가려니 사랑의 에너지가 보통 부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암 덩어리를 키운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곳에 평화가 있는 줄 알고 있답니다.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 안에 누구도 평화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은 없을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을 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그리 녹녹한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편은 마약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진통제로 쓰여 졌습니다. 마르크스도 종기를 앓고 있었기에, 신기하게 아편만 하면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헤겔법철학 비판』서문에서 종교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본질이 참된 실재를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종교는........ 인간 본질의 판타지적 현실화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반대하는 투쟁은 간접으로는, 그 영혼의 향기가 종교인 세계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천대받는 사람들의 탄식이요, 몰인정한 세계의 인정이요,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그것은 대중의 아편이다. 행복에 대한 미망을 대중에게 주는 종교를 폐지한다는 것은 대중의 현실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 말은 현재에도 공히 적용되는 논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이유가 종교 내부에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종교가 현실을 구원하거나 바꿀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설득할 방법론을 스스로 포기하고 옛날의 기복적 종교형태를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종교역사를 더듬어 보십시오. 언제 어느 종교가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종교는 그 시대에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세상과 자기들과는 다르다고 신성한 예배당 안에서 오만스런 거짓을 설교했습니다. 편을 가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었습니다. 종교적 신념은 무섭도록 적과 동지를 구분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상에 가장 많은 투쟁과 전쟁은 종교적인 명분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종교전쟁이야말로 인간성을 황폐화 시켰으며, 인간의 마음에 가장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한 광고효과를 주며 지구상에서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늘 종교는 자기들이 세상의 정복자인양 따르는 사람들에게 명분을 주며, 맹신과 광신의 어두운 터널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가 아닌 세상에 분열을 조장하는 명분만 만들어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말 신이 존재함은 신에 의한 통지가 아니라 인간이 신의 뜻을 받들어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절대로 신은 세상을 통치하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정(神政)을 대신하겠다는 오만과 야욕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인간의 세상입니다. 다만 인간들이 마음에 평화를 원하고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다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 안에서라기보다는 이웃과의 암묵적인 ‘사랑의 계약’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의 인류는 종교보다 더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단체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기업들도 ‘이유추구보다 가치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조짐들이 바로 미래를 위한 거대한 ‘인류의 담론’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전선에서 군복을 입고, 투구를 쓰고, 군화를 신고, 허리에 칼을 찬 중세시대의 기사인양 왕정을 외치고 있습니다.
분명 아버님이 그리시던 심정문화세계와 지금 우리가 구획(區劃) 짓지 못하고 외치는 2020비전은 그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종교는 마약이 맞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는 진통제내지는 청량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 반대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은 중세시대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교인이란 단어를 쓴 것입니다. 진정한 식구라면 그리움이 앞서야 될 것입니다. 아버지보다 더한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식구였던 사람들도 교인으로 변화되어가는 무서운 석화현상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천정궁에서는 두 따님의 결혼식을 준비하여 치렀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결혼을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비밀리에 행하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축하금을 들고 참가해야 하는 비밀 결혼식, 누구에게 물어봐도 정확한 답변을 못해주는 결혼식을 해야 하는 사정이 뭡니까? 가장 소중하지만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결혼식을 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수많은 ‘경우의 수’중에 ‘어쩔 수’에 걸린 것입니다. 그 ‘어쩔 수’에 걸린 우리의 많은 문제들이 있기에 누구도 이것이 ‘잘못된 수’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고백 후에 오는 것이 참회이며, 그 다음이 용서입니다.
아버님이 계신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셨을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아버님이 안 계신 지금, 어쩌면 우리는 잘 훈련된 병사를 양성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없으니까요. 명령에 따르는 사이보그처럼, 우리는 뇌가 없으니까요. 지금 이 상황을 반전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법은 없을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어머님께 부탁드립니다.
전도하라는 말씀을 잠시 접으시고 침묵하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가끔은 웅변보다 침묵이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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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16. 14:01
종교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시는 같습니다. 사람이 하는 것들에 너무 기대가 크시군요.그럴수록 실망만 커집니다. 이상은 이상 현실은 현실입니다. 종교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져보는건 어떨까요.
14.09.16. 15:28
진실로 오랜만에 지각있는 목회자(?)의 양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듣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내면으로만 감추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식구님 모두에게 각성의 촉매제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더 지속적인 의로운 목소리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내면으로만 감추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식구님 모두에게 각성의 촉매제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더 지속적인 의로운 목소리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14.09.16. 17:09
종교인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다른데와는 다르다는 착각 달라야한다는 착각에 빠져있어요.잘 고르면 좀 나은데도 있겠죠. 그러나 좀 나은데가 통일교는 아니에요.통일교는 탈출만이 살길이여요.
14.09.16. 18:43
제목이 그럴 듯 하군.
마르크스를 위한 변명이라...
영계에서도 마르크스의 확실한 추종자로 인침을 받겠지.
그때 쯤이면 축하해야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할지 판결이 나오겠군.
어쨌든 인생은 자기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 가장 자연스러운 결혼식조차 마치 결사대를 헤치고 가야하는 것처럼 괴롭게 치루어야하는 연진, 정진님을 동정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과 산다고 불평하며 사는 2세들은 입을 다물지어다.
서로를 자유롭게 하라.
마르크스의 추종자가 되었다한들 뭐라하던가? 가고 싶어 간다는데.
참자녀님들의 고통을 생각해 본 적 있던가?
영적으로 가장 힘든 길을 간 자녀님들이시다.
지금이라도 자유케 해드리길.
마르크스를 위한 변명이라...
영계에서도 마르크스의 확실한 추종자로 인침을 받겠지.
그때 쯤이면 축하해야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할지 판결이 나오겠군.
어쨌든 인생은 자기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 가장 자연스러운 결혼식조차 마치 결사대를 헤치고 가야하는 것처럼 괴롭게 치루어야하는 연진, 정진님을 동정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과 산다고 불평하며 사는 2세들은 입을 다물지어다.
서로를 자유롭게 하라.
마르크스의 추종자가 되었다한들 뭐라하던가? 가고 싶어 간다는데.
참자녀님들의 고통을 생각해 본 적 있던가?
영적으로 가장 힘든 길을 간 자녀님들이시다.
지금이라도 자유케 해드리길.
┗ 14.09.16. 19:49
인간 못된 것들이 하는 소린데 신경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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