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년에 소속 교회 나가기를 중단했지만 교회 전체 소식에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축복 2세입니다.
최근, 미국에서 독자행보를 하고 계신 문형진님의 설교 말씀과 성전교회 (Sanctuary Church) 활동상을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 오늘 여기에 신앙고백 비슷한 의견을 발표하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전 문형진님의 사상과 성전교회 활동을 지지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자녀님들의 독자행보들에 대해서도 일종의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글에서는 형진님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단 한번도 그 분을 공적이나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의 지지는 순수한 개인적 생각이며 자발적 발언이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또, 성전교회에 열렬한 신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아직은 없습니다. 단지 그 분의 새로운 교리해석과 독립적 교회 활동이, 그간 고민했던 내 신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혹,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식구님이나 2세분들이 여기에 계시다면 참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에서 펜을 잡았습니다.
저는 평범한 교회 2세입니다. 어릴 때는 친부모보다 참부모님을 더 좋아해서 집이나 학교생활보다는 교회생활을 더 열심히 했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 원리연구회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신앙에 문제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통일교인인 것이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 (그 이유는 뒤에 나옵니다)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가끔, 교회 문제점들로 입방아를 찍는 언론들은 우리 교회를 여전히 신흥 이단종교로 취급하며 가십거리 정도로만 다루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고, 또 사회생활, 직장생활하는데 통일교인인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랫만에 교회에 가서 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약간 촌스런 장식으로 꾸며진 예배실에서, 낯 익은 식구님들이 찬송가를 질질 끌듯이 천천히 부르고 있었는데, 처음엔 졸리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가라앉더니, 나중엔 눈물이 날만큼 서글퍼졌습니다. 그때, ‘이건 아니다’는 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더군요. 그동안 나도 모르게 금이 가기 시작한 신앙이 아마 이 날 드디어 깨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그 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설상가상, 참아버님 성화식후 교회내서 황당한 사태들이 줄줄이 터지고 있던 때라, 두번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 후, 저는 주말에는 다른 기독교 교회들이나 다른 종교공동체들을 견학했습니다. 그들의 교리서도 읽어보고, 대화도 나누었는데, ‘인간들은 원래 생각들이 이렇게들 많이 다르구나’는 확신이 서더군요. 그러나, 모두의 공통점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건 바로 “종교적 열정”입니다. 그들도 나처럼 자기 가슴깊이 뭔가 풀리지 않는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저리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결국 그 어느 곳도 내 교회가 되지는 못 했습니다. 내 마음은 여전히 친숙한 우리 교회 식구들과 문화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게 참 괴로운 마음의 질곡이더군요. 통일교인이 되는 것은 부끄러워 교회에는 가지 못하겠고, 그곳 사람들은 (물론 모두 다는 아니지만)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놀고 싶어지니까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형진님의 별도 행보가 내 호기심을 끌었습니다. 주로 유튜브에 올라오는 그분의 설교 말씀을 들었죠. 첫 느낌은, 어색하다, 신기하다, 참신하다가 골고루 섞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그 분의 말씀에서 뭔가 “번쩍”하는 신선함이 느껴졌습니다. 그게 무언가 궁금해서, 더 집중해서 그 분의 말씀을 듣게 됐고, 듣고 난 후에도 내용을 분석하면서 그 분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죠.
그러다, 드디어 내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았습니다. 찾은 단서를 따라 계속 탐구하고 사색한 결과, 그간 고민했던 거의 모든 신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마음이 편해지고 자유로지면서, 신앙생활도 기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죠. 단, 나의 새로운 신앙은 한 교회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도 나름의 진정성과 합리성이 있다면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포용적인 형태가 되었습니다.
서두가 좀 길었습니다. 이제 본론을 말하겠습니다.
1. 우리 세대가 당대에 교회의 뜻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선배가정 어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처음 입교했을 때는 그 감동과 열정속에서 교회의 뜻(지상천국)이 아무리 길어봐야 10년내에 이루어질 것으로 모두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협회창립 60주년이 지난 오늘 우리 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지상천국 창건에 필요한 인원과 재원에 비추어 보면 새발의 피도 되지 않습니다. 뜻을 이루기는 커녕 지금은 교회 조직 자체가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심각한 자중지란을 겪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객관적 시각에서 냉철하게 바라보면, “비젼 2020”은 또다른 꿈일 뿐입니다, 교회가 항상 희망을 가지고 만들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실패하고, 또 다른 꿈을 만들어야 하는. 그런 꿈꾸기가 이제는 지칠 때도 됐건만, 이런 난센스를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뜻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고, 현실은 뜻 실현을 언제나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중앙본부의 결론은 언제나 딱 하나 뿐이죠 --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한다.” 그리고, 일반식구들은 윗선 지도자들이 어련히 잘 알아서 시키겠거니, 역시, 그냥 무조건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질곡에 빠져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다죠,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이상 증상이다’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교회가 지금 그와 비슷한 정신이상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점이 내가 떳떳한 통일교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 였습니다. 난 우리 교회가 좀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질곡은 단지 꿈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하다 그냥 죽는 원로 선배 식구님들의 성화식에 우리는 계속 가야 하고, ‘곧 될거야’ 라고 믿으며 삶에 지친 노구를 이끌고 오늘도 교회가 시키는 일을 어떻게든 하려고 발버둥치는 부모님들의 고생을 우리는 날마다 봐야 합니다. 이건 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현실이며,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이런 찹찹한 마음을 가지고 긴 고민의 시간을 가진 결과, 저는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중 두 가지를 바꾸면 신앙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우리 당대에 반드시 교회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여기서, 교회의 뜻이란 ‘지상천국 건설’을 말합니다.
둘째는, ‘전체 구원을 이루기 전에는 개인적 구원과 행복은 없다’는 생각. 전체 구원이란 ‘세계 인류 복귀’를 말합니다.
이 두 생각은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의 뜻을 우리 당대에 이루는 것이 불가능함은 물론이거니와,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꼭 불행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먼저, 이런 문제와 판단은 나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도 아니고, 어떤 개혁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첫번째 바뀐 생각을 한번 보죠 -- 우리 세대가 죽기전에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로마에서 국교가 된 후부터 계산해도, 카톨릭교회는 지금까지 약 1,700년간을 원래 혈동을 유지하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근대국가들의 출현으로 교권이 바티칸 하나로 줄어든 후에도 (1870년대) 현재까지 145년간을 생존하고 있으며 노화나 사망의 조짐이 전혀 없습니다.
유력한 한 영국 저널지의 조사에 따르며, 바티칸 중앙공회가 지금 가지고 있는 현금가용재산은 최소한 6천550억원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전문투자가들에 의해 계속 증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금만 그렇고, 천년간 유럽 각국에서 기증받거나 빼앗은 명화, 보물, 부동산, 또 전 세계 신도들의 연 회비등을 다 합치면, 총자산의 규모는 아마 우리의 상상밖일 것입니다 (이건 카톨릭이 공개하지 않죠). 신도 수 12억과 더불어, 로마 카톨릭교회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종교조직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부터 계산하면 거의 2,000년간을 생존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가 그 막강한 교권과 재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이루었나요? 아니죠. 그들이 노력을 안 했을까요? 천만예요. 처음엔 성 프란체스코의 사랑과 봉사같은 것으로 선교하다, 그런 속도로 가다가는 세계 복귀는 커녕 유럽대륙 하나도 정복하지 못 할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세상에, 죽은 생명도 살려야 하는 교회가 사탄의 자식들 때려잡는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종교재판, 줄줄이 일으키며 교회 뜻에 거슬리는 넘들은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그래도 안 됐어요.
세계 복귀, 이거 쉬운 일 아닙니다.
왜 안 됐을까요? ‘그들에게는 통일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가설을 세워보죠. 그리고 겸손하게, 배짱을 한번 내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딱 500년만 줘바라,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다! 그리고, 그 가설을 증명해 보이는 겁니다. 제일 센 넘, 카톨릭이 2,000년이 걸려서도 못 한 일을 통일교인들이 500년만에 해내는 겁니다. 이들보다 75% 빨리 하는 거니까 그 정도면 자존심 충분히 세우고도 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증거들을 보면, 하나님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약 138억년 이전에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또, 아무리 짧게 잡아도, 2만3천년 이전에 첫 현생 인류를 지구상에 출현시켰으며, 6,000년전에야 비로소 최초의 진정한 인류의 조상들로 아담과 해와를 지목하셨다고, 우리는 역사를 종교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지창조 후 하나님이 아담 해와없이 혼자 사셨던 시간이 약 13,799,994,000년 입니다. 그 끔직할만큼 긴 시간동안, 하나님은 기쁨의 대상들도 없이 혼자 뭐 하고 계셨을까요? 외로우셨겠지요? 아니요. 성경은, 하나님은 창세 첫날부터 좋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3 - 5) 아담 해와가 태어난 이후에는 ‘심히 좋으셨’던 것이고, 그들이 타락한 후에 지금까지 크게 슬퍼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천지창조후 하나님이 슬퍼하신 시간, 6,000년은 자신이 살았던 총 시간의 0.0000004%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계산은 틀립니다. 6,000년을 무한 (∞) 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럼, 답은 영(0)이 됩니다. 수학적으로는, 하나님은 슬퍼하신 적 없는 것과 같다는 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건 좀 궤변 같으니까 (사실은, 우리가 ‘무한’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일단 그 정도로 숫자를 잡아놓고, 이게 얼마나 짧은 시간인 지를 한번 느껴 보죠. 하나님이 우리처럼 약 100년정도만 사시는 분이라고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있어 6,000년은 약 21분 정도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21분 가지고 눈물의 복귀섭리 드라마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존귀하신 아버지가 20분 넘게 슬퍼하고 계시니 보통 일은 아니지요. 그런 분에게, 딱 2분(약 570년)만 더 기다리세요,라고 말하면 큰 불효일까요?
제 답은 “아니다” 였습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고 쉽게 기다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주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같으니 그 분에게 2분은 1년4개월정도의 긴 시간일 수 있다”고 하실 것 같네요. 그러나, 그 비율은 아담 해와없이 하나님 혼자 지내신 기간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그럼, 그 값은.... 관 두죠, 내 계산기 자리 수가 모자랍니다. 결국, 그 어떤 비율을 적용해도, 하나님의 슬픔은 상대적으로는 엄청나게 짧은 찰나의 사건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즉, 역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라, ‘우리가 당대에 뜻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는 것이, 교회에게는 그렇게 이단적인 생각일까요?
그렇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지금 우리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시간적 절박감”은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 들 왠지도 모르고 그냥 서두르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이번에 우리 교회의 이런 이상심리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거대한 우주적 시간의 틀을 가지고 섭리를 다시 바라본다면 상황이 금방 좋아지지 않을까요?
한번 보세요 -- 왜 교회가 거의 착취하다시피 일본 식구님들 재산 다 털었나요? 천정궁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천정궁은 왜 지었나요? 바로 우리 당대에 지상천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시간적 절박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세계적 규모의 정치국가를 우리 당대에 세우기는 불가능하니까 (불법일 수도 있다것은 둘째 치고), 윗선 지도자들이 지상천국을 우선 상징적으로 만들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상징”하는 궁도 짓고, 헌법도 만들고, 국민증도 찍고 하는 것이죠.
“상징”은 아마 통일교회가 가장 좋아하는 낱말일 것입니다. ‘목표 달성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면 일단 상징으로라도 해라.’ 나름 진심어린 좋은 의도가 있지만, 교회가 이제는 모든 일들을 상징적으로만 하려는 버릇이 든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훨씬 쉽고, 재미있고, 격조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두 다 행사 중독증들이 걸린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 하나 전도해 선한 원리인 만드는 것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시간도 엄청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행사는 재미있죠. 단시간에 효과도 좋아요. 즐거운 세계문화축전 한다고 손님들을 체육관에 초대한 후, 그 문화축전의 한 행사인 축복식을 전세계에 생중계 해버리면, 일시에 2만쌍을 복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징일 뿐이지만.
시간의 절박감은 종말적 말세론이 지배하는 일부 숭배집단들이 가지고 있는 멘탈리티입니다. 우리는 그런 종말론 믿지 않잔아요? 그런데도 언제부터 내게 이런 시간적 절박감이 몸에 배였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객관적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저는 그동안 나를 옥죄던 시간적 절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시간적 부담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교회의 뜻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아니죠. 어차피 안 될 것, 괜히 마음에 부담만 자꾸 쌓지말고, 그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만 집중해서 하고, 그 결과를 후대에 물려주어 그들이 뜻을 계속 이어하게 하는 겁니다. 너무나 자연스런 인간사의 도리를 따라가는 것이죠.
내 느낌으로는, 형진님의 성전교회가 이런 말세적 종말관이나 시간적 절박감을 깨끗하게 청소해 버리고, 대신 마음의 여유와 기쁨을 가지고 각자의 신앙에 충실하는 현실종교적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과 맞는 이런 성전교회의 문화에 친화감이 든 것이 제가 형진님을 지지하게 된 첫번째 이유입니다.
혹자는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죽고나면 후손들이 잘 해서 교회 뜻을 꼭 이룬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 “걔내들도 우리처럼 뒤로 미루지 않을까?” “뭔가 보장이 있어야 안심이 되서 ‘당대 뜻 이루기’를 포기할 것 아닌가?”
이에 대해 제가 얻은 답은,
“뜻 이루기의 부담을 식구 개인들에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움직이는 운영시스템에 지우면 어떻냐”
는 것입니다. 그 운영 시스템이란 “살아있는 생명체적 조직”을 말합니다. 조직도 사람처럼 태어나고, 성장하고, 일하고, 죽습니다. 어떤 목표 달성을 하는데 있어, 조직은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에서도 조직을 “법률적 사람" (법인) 으로 인정해, 사람에게 주는 똑같은 법적 권한을 법인들에게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백년이 넘어야 이루어지는 일은 (가령, 지상천국 건설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인이 하게끔 해야 합니다.
교회의 뜻은 한시적 생명을 사는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조직이 이루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만, 가죽과 이름만 가지고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큰 뜻을 이루려면 사람은 모름지기 “조직”을 남기고 죽어야 합니다. 참아버님이 그렇셨죠.
그러니까, 우리 개인들은 직접 지상천국을 건설할 필요가 없고 그걸 할 수 있는 조직을 남기고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개인들에게 지상천국 건설은 불가능한 목표지만, 어떤 조직을 만들고 죽는 것은 충분히 달성 가능한 목표입니다.
그렇니까, 저의 최종 결론은
우리 당대의 전략은 지상천국 건설이 아니라, 그를 이룰 때까지 장수할 수 있는 건강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였습니다.
조직에 대해 간단히 부연하고 오늘 글을 맺겠습니다. 난 조직론의 전문가가 아니고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비유를 들어 포인트만 지적하려고 합니다.
조직을 인간의 몸에 비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식구 개개인은 세포들입니다. 각각의 세포들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 조직과 생리 시스템아래, 자기 고유의 생태와 기능에 따라, 각자의 위치를 찾고 제 기능을 발휘할 때, “몸”이라는 전체 조직이 탄생합니다.
이런 조직에서 개별 세포들이 할 수 있는 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또, 몸 전체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각자가 건강한 세포가 되는 것”
입니다. 그 세포들의 조직이 몸 전체니까, 그런 건강한 식구들로 조직된 교회는, 당연히, 건강하고, 일 잘 하고, 아주 오래 생존하면서 (최소한 앞에서 약속한 500년정도) 지상천국을 꼭 이루는 법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커지는데 한계가 있지만, 조직은 개별 세포들과 생존시스템만 받쳐준다면 거의 무한히 클 수 있습니다.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근육을 키울 수 있습니다.
조직과 관련해서, 개별 세포인 식구 개개인들이 건강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세포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능들을 모두 발휘할 때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 때 몸 전체도 가장 큰 도움을 받죠. 세포 하나가 자기 능력을 벗어나 마구 커버리면 암세포가 되어버려서 몸 전체에는 오히려 위험이 됩니다. 개별 세포들은 오직 자기가 타고난 능력만큼만 커야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건강은 양 극단에 치우지지 않고 균형과 중용을 찾을 때 실현되는 좀 어려운 덕(德)입니다.
따라서, ‘식구 개개인들이 건강하다’는 것은
“각자가 타고난 성품과 능력을 모두 발휘하고 있다”
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성품과 능력을 벗어나 마구 커 버리는 암세포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식구들이 모여 조직된 교회는 당연히 건강하게 성장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무럭무럭 성장한 후에, 때가 되면 교회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목표로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령, 지상천국 건설 같은 것 말입니다.
다시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교회는 현재 지상천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근육과 힘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목표를 그렇게 크게 세우는 것은 개별 세포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만 주는 무모한 짓입니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은 물론, 오히려 건강에 치명적 환우를 가져오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효성을 보이면 흡족해 하시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그분은 우리가 좀 더 지혜롭고 성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다 큰 어른이 되는 것을 원하실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근육과 힘이 모자라다면, 밖에 있는 목표에는 정신을 뺏기지 말고, 안으로 건강을 다지는 내부 조직 활동에 치중하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닐까요? 건강을 다지려면 좋은 음식을 꾸준히 먹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에 있어, 이는 깨끗한 헌금만 받고 이를 공의롭게 운용하며, 신도 개개인의 신앙을 기쁨과 사랑으로 활성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설사 재단이 파산한다 하더라도, 절대 식구들 착취하듯이 돈 걷지 말고, 헌금은 오직,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각자 할 수 있는만큼만 하게 해야 합니다.
조직이 몸과 다른 점은 몸의 세포들은 태어날 때 이미 완벽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엮여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의 구성원(세포)들은 그렇지 않죠. 개별 자율성이 있어서 싫으면 떠나 버립니다. 다 떠나면 조직은 자연스레 해체됩니다. 이 자율스런 세포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은 무었입니까? 왕정시대때 그 방법은 “강제”였습니다. 즉, 싫어도 강제로 시키면 사람들은 제 자리 지키며 세포 역할 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그 방법은 “돈"입니다. 싫어도 돈이 필요한 사람은 제 자리 지키며 일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시대에 있어 그 방법은…
그건 바로 “사랑”과 “신뢰”입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믿을 수 있는 곳에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민주주의 세포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나요? 왕정? 자본? 민주?
깨끗한 헌금만 받고, 공금이 항상 투명하게 공개되고, 모두의 공의를 위해서만 쓰여질 때, 신도들은 그 교회를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재정적 식이요법이 일상화 될 때, 그 교회는 비로소 건강한 조직을 가진 하나님의 몸이 되며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입니다. 난 우리 교회가 그런 사랑과 신뢰로만 식구들을 묶는 민주주의적인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초창기 효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형진님의 성전교회가 이런 민주주의적 교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게 제가 형진님을 지지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교회에게 있어 규칙적인 운동이란, 우리가 평소에 하던대로, 식구들이 같이 모여 한마음으로 신앙하고, 서로간에 우정어린 친교를 활성화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그럴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합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들은 개별 세포들에게 유익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 말합니다. 프로그램을 빙자해 그들의 시간과 재산을 또 착취하려는 옛 버릇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식구들이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 먼저 되기 전에는 교회는 절대 건강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 지상천국도 물 건너 가는 것이죠.
‘그런 건강하고 아름다운 조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를 다음 글에서 제가 감히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을주환”은 제 별명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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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인생의 나침판을 원리와섭리적으로 잘 볼수 있다면
길수도. 짪을수도 있는데
그리 쉽게 되기 어렵습니다
수십년 신앙했어도
확실한 인생관이 수립이
않되면 우왕좌왕 하게
됩니다
국민들이 꼭지켜야 하는
어렵지 않은것도 바꾸기
어려운데 쉽게 타락성이
바뀌고 배운것 실천이
쉽게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온전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어느쪽이 바른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이길은 돈과 명예와 바꿀수
없는 귀중한 길이기에 그렇
습니다
6호선 광흥창역 2번출구
100m 미지빌딩2층
일요일 11시에 훈독모임에오셔서 질문도 하고 의문을 풀어보세요.용감해야 나의 길이 열림
니다 모르고 용감하면 망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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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
버릴것은 버리고. 고칠것은
고처야겠지요
좋은 의견 참고가됩니다
귀한 분인데 뵙고 싶습니다
오시면 이용광 이라는 사람
찾으세요
잘안내 하고 의문 나는것
아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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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
솔직히 글이하도 길어서 읽고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기에 대충 읽었 습니다.500년을 생각하고있나본데 십여년전에 어느 교수에게 우리 뜻이 앞으로 한 200년 쯤 걸리면 이루워 질 까요? 하며 물어 본적이 있었늣데 그 교수분은 아마 더 걸릴것 같은데요. 난 200년도 길게 잡은건데..우리 어머니가 뜻을 아신지가 57년도부터 니까 거히 육십년 가까히 되는 군여 그때 는몇 년 안에 뜻이 이루워 진다고 했지요 이곳 군에서 제일먼저 전도된 어머니는 뜻이 이루워지면 군수가 될거라 했지요. 근데 어머니는 십여년 전에 돌아가시고 나도 80가까운 나이가 됬답니다. 나도유튜브에서 형진님 설교를 들었지만 다 받아드리기는 무리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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