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종교인임을 남에게 이야기 할 때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다만 자신이 종교인임을 밝히기를 주저했던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상한 종교, 곧 사이비로 여기는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한 종교인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를 못하는 세상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으로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해 간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남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나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그것을 밝히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정상적인 생각이나 상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길 때이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진실한 종교인, 어떤 종교의 신실(信實)한 신자(信者)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왜 꺼려야하는 일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신실한 신자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왜 그런지를 이해하게 될 것인데, 일단 신실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교리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며 그 교리대로 생활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 교회만 왔다가 갔다 하는 사람은 신실한 종교인이라기보다는 그 종교에 적(籍)을 둔 사람이지 진실한 종교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종교의 교리라는 것이 세상의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이해를 하는 것이나 인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常識)이나 세상의 지식(知識)을 부인하거나 이중적(二重的)인 가치관(價値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소위 덜떨어진 사람이거나, 비양심적이고 교활한 사람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하는 것이 된다.
곧 신실한 신자(信者)의 의미는 이런 의미가 내포되는 것이다.
만약 현대의 젊은이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상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신실한 신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상적인 상식을 배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젊은이들은 신실한 신자가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현대의 과학과 현대의 지식 등을 접할 수 없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현대의 젊은이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신실한 신자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종교와 여러 가지도 비슷한 형태의 조직이 있는데 다단계 조식이 아주 종교와 흡사하다.
다단계를 설계하는 사람이 있고 모집책이 있으며 거기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다단계의 형태인데, 다계가 처음 발생할 때는 협동조합의 발전된 모습으로 좋은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다단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어 다단계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가족 가운데 다단계의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피해가 광범위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게 하는 사건들이 심심하면 나올 정도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탐욕과 그것을 이용한 다단계 설계자들 때문이다.
지금도 테헤란로에는 다단계 업체가 성업 중이고 공부를 해야 할 대학생들이 거기에서 젊은 시간을 아깝게 보내는 학생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며 많은 사람들이 다단계에 가입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단계에서 약속하는 그런 배당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실현할 수 없는 이익이기 때문에 그 약속이 실현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식이 있으면 금방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상식이 부족하거나 탐욕에 눈이 멀게 되면 그 약속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발을 담그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약속하는 이익은 조직폭력배들이 하는 고리대금업에서나 가능한 이익으로 정상적인 기업을 운영해서는 절대로 달성할 수 없는 이익이다.
따라서 처음에 배당되는 배당금은 사실은 이익금이 아니라 뒤에 가입하는 사람의 가입금을 잘라서 주게 되는 것이며 그러다가 가입자가 줄어들면 배당금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줄행랑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지급한 배당금도 재투자를 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가입자들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털리게 되는 것이며 계획적으로 다단계를 설립한 몇 사람들만 가입금을 가로채게 되는 것이 다단계의 본질이고 실상이다.
다단계 이야기를 언급한 것은 종교가 다단계처럼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단계를 예로 든 것이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끊임없이 헌금과 희생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황제처럼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가는 구태여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다단계에 빠지는가?
위에서 언급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진실로 가능한지 아닌지를 생각해보지 않거나 주변 곧 아는 사람의 권유를 그대로 믿는 것의 문제이다.
자신이 평생 모아 놓은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도 다단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단계가 아니라도 이 사람의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인 사람이다.
종교도 마찬가이이다.
종교는 돈도 바치지만 자신의 시간과 노력도 바쳐지는 곳이다.
종교에 몸을 담은 사람들도 아무 댓가 없이 시간과 노력과 돈을 바치지는 않는다. 반드시 반대급부를 약속 받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약속은 죽어서는 천국을 가는 것이고 살아서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의 이익들이다.
그러나 그런 약속이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며 그것에 대한 책임도 추궁할 수가 없다.
다만 종교 자체에서 반사회적인 문제만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고 무조건 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 사실 다단계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시 종교 이야기로 돌아가서....
종교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나 약속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함정 혹은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함정이 무엇이고 속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그 함정이라는 것과 속이는 것은 이것으로
~~하면 이나,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이런 것들을 전제조건(前提條件)이라고 하는데 그 전제조건은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학생에게 서울대학교를 보내주겠다고 했을 때 서울대학교를 가지 위한 전제조건은 반드시 공부를 잘 하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하면 서울대학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해야 하는데 ‘공부를 잘 하면’ 이라는 전제조건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화세계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상천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반드시 미륵불이 현현해야 하고 예수가 지상에 강림을 해야 하는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천국인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이기적인 사람에서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천국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나 불가에서 말하는 예언 곧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는 두 가지 조건이 선행이 되어야만 하는데 재림이나 모든 사람이 변화가 되어야만 하는 두가지 조건 중에 한 가지도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한 발자욱만 나가서 생각해 보면 종교에서 하는 약속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실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식에 맞지 않는 교리들을 믿어야 하고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약속도 믿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신실한 종교인은 반드시 예수가 재림하는 것을 믿어야만 하며 따라서 휴거를 믿지 않으면 신실한 신자가 될 수가 없다.
신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담이 930살을 살았음을 믿어야 하고,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음을 믿어야 하며 낙원 같은 에덴동산이 어디엔가 있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젊은이들이 현대의 과학과 지식에 반하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현대의 젊은이들이 진실한 신자라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신을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광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종교의 교리가 사실과 상식에 부합하는 것인가와, 종교에서 약속하는 내용들이 실현가능성이 있는 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단계가 헛된 약속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더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종교의 교리와 약속이 자신의 상식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순간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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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1일 금요일
젊은이들이 신실한 종교인이 될 수가 없는 이유....자신의 인생에 무책임한 종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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