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5. 18:35
현진님이나
그의 무리들이 말하는 장자권은
그저 한 가정에서 논하는 것으로 4000년전에 아브라함가정에서나 해당이 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장자권을 논하려 한다면 반드시 현재 사탄이 주관하고 있는 주관권을 능가하는 권위를 가져야만 장자권의 복귀가 가능한 것이 원리적입니다.
4000년전에야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위한 기대를 쌓는 시대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이라는 한 가정에서 가인아벨을 통한 장자권복귀였지만, 모세때만 하더라도 장자권복귀는 범위가 한참 달라져서 민족적인 단계로 넘어갑니다.
더우기
예수님 때에는 가인아벨을 통한 장자권복귀가 국가적 범위에서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천주적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가인아벨을 통한 장자권복귀임에도 불구하고, 현진님이나 그의 무리들은 한낮 하나의 가정에서 장자와 차자라는 개인적인 입장을 세워놓고 장자권복귀를 거론한다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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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38
현진님의 삶을 이야기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놓고 장자권복귀에 대한 범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진님의 삶이야 본받을 만한 하지요.
물론
야곱과 에서의 인생에서도 야곱이 아벨로서 하나님의 편으로 장자권을 복귀하는 섭리적 중심인물이 되어있지만, 실재적으로 이삭인 부모를 모시고 효도의 삶을 산 것은 야곱이 아닌 에서입니다.
야곱은 21년간을 부모를 떠나있으면서도 에서가 함께 부모에게 가서 인사하고 같이 살자는 말에도 불구하고 다름 길을 택해 부모를 떠난 삶을 산 것이 야곱입니다.
그리 볼 때 야곱의 삶보다도 에서의 삶이 남자답고 용맹스럽고 가정에 있어 모범이 되며 효자의 삶을 산 것은 에서입니다.
현진님의 삶이야 본받을 만한 하지요.
물론
야곱과 에서의 인생에서도 야곱이 아벨로서 하나님의 편으로 장자권을 복귀하는 섭리적 중심인물이 되어있지만, 실재적으로 이삭인 부모를 모시고 효도의 삶을 산 것은 야곱이 아닌 에서입니다.
야곱은 21년간을 부모를 떠나있으면서도 에서가 함께 부모에게 가서 인사하고 같이 살자는 말에도 불구하고 다름 길을 택해 부모를 떠난 삶을 산 것이 야곱입니다.
그리 볼 때 야곱의 삶보다도 에서의 삶이 남자답고 용맹스럽고 가정에 있어 모범이 되며 효자의 삶을 산 것은 에서입니다.
17.07.25. 22:39
참가정에 장자권복귀가 뭔 필요여. 아버님이 장자권복귀의 승리권하에 장자권을 가지고 태어나셨고 1998년 하나님을 중심으로 3대에 현진님에게 장자권을 상속해주셨다.
┗ 04:43
참가정은 섭리의 중심에 있기에 모든 섭리적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참가정에 장자권복귀가 필요한 것보다도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 참부모님이 중심이기에 참가정의 일원도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을 출발하면서 천주적 레벨에서 가인아벨의 노정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선택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1차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에서 효진님과 현진님이, 제2차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는 현진님과 국진님이, 제3차 천주적가나안복귀노정에서는 국진님과 형진님이 하나님과 참부모님에 의해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실은 제3차인 국진님과 형진님 때에 성사됩니다.
참가정에 장자권복귀가 필요한 것보다도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 참부모님이 중심이기에 참가정의 일원도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을 출발하면서 천주적 레벨에서 가인아벨의 노정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선택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1차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에서 효진님과 현진님이, 제2차 천주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는 현진님과 국진님이, 제3차 천주적가나안복귀노정에서는 국진님과 형진님이 하나님과 참부모님에 의해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실은 제3차인 국진님과 형진님 때에 성사됩니다.
15:18
과연 섭리가 그렇게 흘러갈까요. 당신이 말한 하나님의 섭리에는 당신이 빠져있어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함에 귀한 자료가 창세기 1-3장입니다. 첫째날부터 다섯째날까지 외적환경의 틀을 만드시고 마지막 여섯째날에 외적기반위에 한 심정적 개인을 세우시며 가정섭리로 창조섭리를 펼쳐나가시고자 했으나 아담해와라는 부부관계에서 타락해서 2세대권인 가인 아벨을 통해 다시 개인을 세우고자 하셨지요. 이로써 아담가정섭리가 종결되요. 노아를 통해 재창조가 펼쳐집니다. 여기서 재창조란 가정섭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된 개인 가정을 세워 확대하는 것이 창조섭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보면
15:35
님의 말씀은 창세기1장의 여섯째날은 볼수가 없군요. 개인이 하나님의 심정을 완전히 상속받아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다는 것은 특정개인이 아닌 인류모두의 걸음이 되어야 하기에 가정권을 통해 그가정의 혈통자녀와 심정자녀들 모두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는 관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이과정없이 그다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란 철저한 분립역사였습니다. 님께서 국가권을 말씀하신들 한개인의 심정을 하나님의 심정권에 공명될 수 있는 섭리가 아니라면 그건 한 개인을 아담해와로 보지 않고 특정개인만을 우상화하는 작업에 불과하며 적어도 당신은 아담으로써의 섭리를 걸어보지 못했을겁니다.
15:40
님의 말씀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님 자신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님이 우상시하는 주체와의 사랑의 관계로 증거하신다면 더 좋을 듯 하네요. 그런 관계속에 계시는 분이라면 참으로 부러울 따름이며 한번 뵙고 싶네요. 당신과 당신 주체와의 사랑앞에 예배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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