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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O” “X”식으로라도 답을 듣고자 했으나 문 총재는 특별한 언급 없이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동아 10월호 기사)

“O” “X”식으로라도 답을 듣고자 했으나 문 총재는 특별한 언급 없이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동아 10월호 기사)




9월8일 경기 가평군 천주청평수련원에 우뚝 선 청심탑(높이 33m, 폭 11m)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난다. 탑에는 아홉 개 장면으로 나뉜 고(故) 문선명 통일교 총재의 일대기가 돋을새김으로 꾸며져 있다. 첫 장면은 태어나는 모습이고 마지막 장면은 인류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 청심탑 내부엔 ‘아버지의 기도’가 적혀 있다.

“참부모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겠사옵니다.(중략) 그 참부모 사상을 몸에 지녀야 되겠사옵니다.”
천주청평수련원은 통일교 신도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한 일본인 신도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9월 3일 ‘논란의 지도자’가 타계했다.

“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반대부터 했습니다.”

1920년 평북 정주군에서 태어난 문 총재는 2009년 출간한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92년 삶은 파란만장했다. ‘떠들썩한 인물’이라는 말마따나 ‘메시아’ ‘평화운동가’ ‘교주’라는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었다. 종교, 인종, 나라가 하나 되는 평화세계를 신도에게 강론했다.

천주청평수련원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문 총재의 빈소가 마련된 청심평화월드센터가 서 있다. 빈소는 이른 아침부터 추모 인파로 붐볐다. 고인의 젊은 시절 모습을 담은 대형 초상화가 꽃 장식 앞에 세워져 있었다. 내·외신기자 100여 명이 문 총재 타계 소식을 전하고자 빈소를 취재했다. AFP AP 로이터 등 통신사와 외국 방송사들도 취재 경쟁에 동참했다. 한 외신기자는 “한국 밖에서는 박정희보다 문선명이 더 유명하다”고 말했다.

문 총재는 20세기 한반도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 중 하나다. ‘스스로 메시아라 했던 한국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스), ‘1970년대를 휩쓴 논쟁적 종교의 지도자’(LA타임스),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영국 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타임)라는 반응이 해외에서 나왔다.

문 총재는 논쟁적 종교인이자 평화운동가다.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설립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7년 완성한 교리서 ‘원리강론’을 통해 종교관을 구체화했다. 각국에 흩어진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겠다고 주장했다. 개신교계는 우상화, 현세주의 등을 문제 삼아 통일교를 이단(異端)으로 몰아세웠다.

교리와 관련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도 통일교는 20세기 한국에서 탄생한 종교 중 가장 성공했다. 50여 년 만에 세계 194개국에 300여만 명(통일교 추산)의 신도를 둔 종교로 급성장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교리 설파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 내외.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이며 하나님의 뜻이 한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통일교 원리는 1950~60년대 청년들의 가슴을 간질였다. 통일교로 개종하는 교수와 학생이 늘어나자 기독교계 대학인 연세대, 이화여대에서는 1955년 통일교 입교자에 대한 제적, 퇴학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 총재는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에서 각각 포교에 나서면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1960년 이후 일본 여성 1만여 명을 한국 남성과 결혼시켰다. 과거보다 교세가 약해졌지만 아직도 통일교 헌금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일본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부터 일본에선 통일교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딸이 한국으로 시집간 집의 부모가 “통일교가 딸을 세뇌시켰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

1976년 9월 워싱턴광장에서 열린 문 총재 강연에 30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 미국 종교계에 충격을 줬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문 총재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미국에서 한때 신도 수를 늘린 것은 개인주의화한 미국인에게 공동체적 가치를 제공한 덕분이라는 분석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9월 3일 “1960년대 말 대안 종교 열풍을 타고 미국에 자리 잡은 통일교가 정치스캔들과 합동결혼식 등 독특한 관습으로 인해 이교적 이미지를 떨쳐내지는 못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같은 날 “미국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인물이었지만 아직 워싱턴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보도했다.

통일교는 종교이면서 기업이다. 교육, 언론, 학술, 스포츠,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세계일보, 용평리조트, 성남일화천마축구단, 선원건설, 세일여행사 등이 속한 통일그룹을 운영한다. 이 그룹의 자산은 2009년 말 기준으로 1조7361억 원 규모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타임스, 일본 일간지 세카이닛포, 유니버설발레단, 리틀엔젤스예술단이 통일교 계열이다. 선문대, 청심국제중고교, 선화예술중고교도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다.

문 총재는 타 종교를 아우르는 평화운동에도 나섰다. 1966년 초교파협의회를 창립하고 세계종교회의를 개최했다. 1985~1987년에는 미국 목사 5000여 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초(超)종교 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중동평화를 위한 초종교 세미나와 평화행진을 개최했다.

통일교는 문 총재를 정점으로 한 ‘유일체제’였다. 핵(核)이 사라진 조직은 크건, 작건 동요하게 마련이다. 인류사에서 새로 일어선 종교는 창시자가 사망한 뒤 세가 꺾이거나 분열한 예가 많다. 문 총재 사후 통일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통일교 어디로 가나

통일교에서는 2009년부터 ‘포스트 문선명’ 구도를 놓고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다툼의 중심에는 3남 문현진 GPF재단 세계의장(43), 4남 문국진 통일그룹 회장(42), 7남 문형진 통일교 세계회장(33)이 서 있다.

현재 통일교 실권자는 한학자 여사라는 데에 통일교 안팎에서 이견이 별로 없다. 통일교는 지난해 신도를 대상으로 ‘참부모님 노정 섭리사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 요지는 ‘한학자 여사는 하나님의 부인’ ‘문형진 회장(7남)은 섭리적인 후계자’라는 것이다. 후계자가 하나님의 부인보다 위에 위치하기는 어렵다. 실질적 교주이자 실권자는 한 여사가 될 소지가 큰 것이다.

통일교의 공식 후계자는 7남이지만, 자산·조직을 관리하는 실력자는 4남이다. 장남, 차남은 1984년, 2008년 각각 별세했다. 장남 격인 3남은 GPF를 이끌면서 ‘종교의 틀을 벗어난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통일교 안에서 공식 후계는 문형진(종교), 문국진(기업)으로 정리됐으나 3남을 따르는 신도 또한 적지 않다. 특히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이 3남을 지지하는 예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3남, 4남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산에 대한 소유권이 분명한 회사와 달리 종교와 같은 신앙의 세계에서 신도를 소유할 수 있다고 보나? 사람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나? 아니다. 물질적 자산을 소유하는 회사와는 다르다. 누가 후계자 이슈를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지 않는다.”(3남, 문현진 의장)

“후계 다툼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 문선명 총재께서 통일교의 상속자, 대신자로 문형진 세계회장을 결정해주셨다. 전 세계 통일교인은 이 결정과 관련해 문형진 세계회장을 환영하며, 존경하고 있다. 그 부분은 총재님 양위의 절대적 고유 권한으로 후계 문제는 종결됐다.”(4남, 문국진 회장)

문현진 의장은 문 총재를 통일교 창시자로 국한하지 않고 보편적 영성에 기초한 평화통일운동가라고 여긴다. 문 총재가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시한 것은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영성을 강조한 초종교· 초교파 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문국진·문형진 회장과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문 총재가 메시아라는 점을 강조한다. 문국진 회장은 “나의 아버지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 우리는 레버런드 문(문선명 목사)이 재림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통일교에서 벌어진 갈등의 기저에는 이렇듯 문 총재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준과 앞으로의 방향성, 메시아관(觀)의 차이가 버티고 서 있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형제간 갈등은 교권을 장악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을 공격한 측면이 강하다. 4남, 7남 측은 2010년부터 3남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자산과 관련해 “되찾겠다”면서 소송을 벌이기 시작했다. 3남 측이 소유한 여의도 땅을 둘러싼 송사와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UCI 관련 소송이 대표적이다. 문 총재가 1977년 설립한 UCI는 통일그룹처럼 기업군을 거느리고 있다. 3남의 장인인 곽정환 전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회장은 사탄이자 타락한 천사장으로 몰렸다. 3남을 지지하는 일부 신도는 출교 조치를 당했다.





형제간 영향력 경쟁

문 총재는 임종 직전 특별한 유훈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국진·문형진 회장은 문 총재 보좌관에게 통일교 섭리와 관련해 유언을 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자식이 말씀을 들으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문 총재는 대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4남, 7남은 “O” “X”식으로라도 답을 듣고자 했으나 문 총재는 특별한 언급 없이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3남도 강남성모병원을 찾아 아버지를 문병했으나 이후 다시 방문했을 때는 4남, 7남 쪽 인사들이 길을 막았다.

문현진 의장은 9월 10, 11일 경기 가평군의 문 총재 빈소를 찾았으나 조문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통일교 측은 3남 부부에게만 조문을 허용하고 함께 온 신도들과 경호원의 출입을 막았다. 3남 측은 “ 아들이 아버지를 뵙는데 협상까지 해야 하느냐.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문 의장 부부만 조문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밝혔다. 문 총재 사후 통일교가 발표한 성화위원회(장례위원회) 유족 명단에도 3남과 그의 가족 전체가 빠져 있다. 통일교 관계자는 “조문을 막은 게 아니라 부부만 조문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형제간 갈등의 밑바탕에는 ‘포스트 문선명’ 시대를 둘러싼 헤게모니 경쟁이 깔려 있다. 문선명 총재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앞으로의 영향력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4남, 7남이 종교로서의 통일교(Unification Church)를 강조하는 반면, 3남은 종교의 틀을 벗어난 통일운동(Unification Movement) 평화운동에 천착한다. 형제들은 앞으로도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한 통일교 인사는 “문 총재의 사후 자녀들의 역할은 문 총재를 따르던 신도들에게 어떠한 비전과 철학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벌이는 형제간 경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 같다.


신동아 10월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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