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타락한 인간이 진리에로의 길에 접함이 어렵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해서 타락한 인간이 진리를 접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를 타락한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목적은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설명해 놓은 것이라면 성령의 역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형진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성경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에게 자세히 가르쳐주지 못하기에 성경을 접하고도 많은 부분의 성경구절이 비유와 상징으로 쓰여져 있기에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인도하고 도와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하고 행하게 하는 것인데 총체적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라는 것인데 참부모님의 가르침인 "위하여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인류에게 주는 첫번째 계명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였고 둘째 계명도 "너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였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에는 고린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여러가지 설명이 있지만 참아버님은 한마디로 "위하여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진님께서 그토록 매주 설교마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시는데, 절실히 간구한다하더라도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복귀섭리연장시대인 2000년의 기독교사는 끝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참부모님의 말씀, 진리를 상속받은 종족적메시아시대인 천일국시대이기에 종족적메시아들이 참부모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훈독회를 통해 말씀을 훈독하고 위하여 사는 삶을 실천하게 되면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반 기성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고요.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진리에 대한 감동을 느끼기 때문에 그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훈독회를 통한 감동의 역사는 통일교에서도 여러나라에서 많은 소식이 들립니다. 기성교인들이 성령을 그리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진리에 있어서 성경은 현시대의 인간에 있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인한 감동을 성령의 역사라 잘못알고 자신이 말씀을 접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의 마음이 성장하고 깊어진 것을 모르고 성령의 역사로만 여기다보니 그러한 감동이 사그러드는 것입니다. 진리로 인한 감동을 느낄 때에 더더욱 말씀을 가까이하면 진리의 주체가, 감동의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언제나 지속되는 것입니다. 초창기 때에 성령이 있었다고 간증을 합니다. 물론 여러가지 현상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인간이 진리에 감동이 되어서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다보니, 몸이 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부르짓기도 하는 것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간의 심성을 회복하는 말씀과 진리는 참부모님을 통해서 선포가 되어졌고, 참부모님을 통해서 실체적으로 이땅위에 실체적으로 행하여진 것이기에 참부모님의 말씀과 걸어오신 길을 흉내만 낸다하더라도 진리에 대한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참부모님의 말씀을 이해못한다면 그러한 성령의 역사라고하는 진리에 대한 감동은 없습니다. 무지에는 완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2015년 7월 1일 수요일
형진님의 성경에 대한 초점은 틀렸습니다. 핵심은 성령이 아닌 사랑입니다
2015.07.01. 10:13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6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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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촛점을 말한게 아니라 성경중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한것이다. 트집을 잡읆 걸 잡아야지.
답글삭제기독교 ㄱ자도 모르면서 기독교를 당신맘대로 재단하는구나 무지와 오만의 극치다
우와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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