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9. 00:29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19422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다. 십계명이 등장한 이후, 이전에 없던 싸움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우상과의 싸움이었다. 참으로 쉽게 끝나지 않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받았다는 십계명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떤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다. 우상숭배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로서 죽음으로 그 죄를 묻겠다는 단언을 하게 된다.
사실 모세가 유일신 신앙을
소개하는 3500년 전의 세계는 ‘우상의 시대’ 였다.
원리는 만물을 주관하고 주인이 되어야 할 인간이 타락해서 자연을 자신 보다 우월한 존재로 섬기게 된 것이라고 그 원인을
설명한다. 해와 달을 섬기거나, 동물을 섬기고, 자연 만물에 정령이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이를 신격화 하여 섬기는 신앙형태는 지금까지도 면면히 남아져 내려오고 있으니, 당시의 미개한 과학적 수준과
세계관으로 놓고 볼 때, 이러한 우상숭배가 얼마나 지배적인 신앙형태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선언한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러한 십계명을 중심으로 모든 우상을
철폐할 것을 선언한 것은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애굽에 계속 있었더라면 기성권력의
반대로 가능할 수 없는 변화였을 것이다. 만일 애굽 안에서 애굽인이 믿던 모든 신을 우상으로 규정했다면,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모든 우상을 철폐하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방법을 십계명으로 선언했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혁명이자 영적 대각성운동이었다.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와 원칙(Values and
Principles)’이 무엇인지를 최초로 선언한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십계명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한 다는 것은 십계명이 명시한 가치와 원칙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함으로 기복과 구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세워진 가치와 원칙을 지키는 일이 ‘우상’적 신앙을 대신하게
되었다.
가나안복귀노정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해 세워주신 원칙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십계명의 가치와 원칙이 실현된 세계는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우상을 추구한다. 우상이 없으면 심리적으로 불안한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만들어서 의존할 수 있는 형상적인 우상을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방의 우상을 모셔다 섬긴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민족을 둘로 나눴다가 이방의
손에 붙여서 멸망을 시키고, 포로살이를 시키면서 모세가 세운 십계명의 가치와 원칙으로 돌아오게 하는 섭리를
하신다.
우상과의 싸움은 십계명이
등장한지 1600년이 지난 예수시대에 다시 한번 크게 등장한다. 우상화 되어 있던 유대교와 그들의
형식화된 신앙 모습을 예수는 좌시하지 않았다. 예수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퍼부으며 십계명과 율법이 주는 정신을 외면하고, 문자주의적
율법에 빠져 본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안에 세우려고 했던 영적인 가치와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기존 종교세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든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놓고
‘죄 없는 자부터 돌로 치라’고 한다든지,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해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 ‘강도의 진정한 친구’라고 불렀던 내용은 바로 우상숭배적 율법주의화된
신앙행위에 대한 영적 각성을 촉구한 내용이다. 결국 예수가 결정적으로 미움을 사게 되어 십자가에 죽게 된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 청소사건’이었다. 예루살렘성전을 찾은 예수는
‘누가 내 아버지의 집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느냐’고 하며
‘여호와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신앙에 분노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하늘이 세운 가치와 원칙을 저버리고 우상놀음에 빠져 있음을 그는 생명을 던지며 깨우치고자
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은
예수라는 우상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었다. 그들은 신비로운 힘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초능력자 메시아인줄로 알고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의 말씀과 같은 ‘가치와 원칙’은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었다.
예수를 따르던 청년 하나가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자, 예수는
“율법을 지키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 청년은
“율법도 다 지켰다”고 답한다. 예수는 “그렇다면
네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 청년이 도망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예수는 죽어있는 십계명에 참사랑의 정신을 집어 넣으려고 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을 다시 되찾아왔다. 그들 앞에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다시
전파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설파한 진리, 즉 예수에 의해 완성된 가치와 원칙이
땅끝까지 전파된 세계였다. 그러한 세계가 되면 '너희들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재림의 희망까지
약속하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설파한 가치와 원칙이 무엇인지를 각성시키고 떠났다. 그런데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는 교회를 만들게 된다.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는 종교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마녀사냥을 하고, 면죄부를 팔고,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가
된다. 개혁자들은 ‘말씀으로 돌아가자(Sola Scriptura)’를
외치며 그리스도의 원칙과 가치 회복을 위해 나선다.
참아버님께서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단순화된 기독교의 우상적 신앙을 배격하셨다.
원리강론은 창조원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했던 창조이상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하는 것을 밝혀주셨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참사랑의 이상인 3대왕권과 4대심정권이 이루어진
심정문화세계이고, 구원섭리의 목적은 그러한 참사랑의 이상세계를 다시 이루시기 위한 것이고,
메시아는 그러한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원리를 통해 밝히셨고, 그러한
복귀섭리의 중심축으로 메시아적 삶을 살다 가신 것이다. 참아버님은 창조원리는 하나님 조차도 벗어날 수 없으며, 스스로
지키는 원리라고 말씀하셨다. 통일원리의 하나님은 가치와 원칙의 하나님이었다.
구약,
신약, 성약시대를 관통하는 섭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참사랑 이상을 중심한 원칙과 가치를 이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모세는 십계명으로, 예수는 복음으로,
참아버님은 원리로 그 원칙과 가치를 중심한 세계를 건설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십계명의 정신이 율법화
되고, 예수의 정신이 배타적 구원론이 되었던 역사적 과오를 우리는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참아버님께서 말씀을 통해, 생애노정을 통해 세우신 가치와 원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역사는
우상을 통해 정신문화적 진보를 저해하는 세력과 이를 철폐하고 영적인 원칙과 가치를 통해 인간의 변화와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싸움이었다. 문제는 어떤 원칙과 가치인가 하는 것이다. 인격혁명,
양심혁명, 심정혁명을 이룰 수 있는 가치와 원칙을 신봉해야
한다.
참아버님이 세운 가치와 원칙을
실천되게 될 때 세계는 변화될 수 있는 진리라고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생명길이라고 여기고 따라온 것이다. 결코
참부모님 믿고 축복받고 천국가기 위해 우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원리는 명쾌한 원칙과 가치를 천명했고,
참아버님은 자신이 세운 원칙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생애를 살아오신 것을 목격했다.
통일가의 혼돈은 바로 이 가치와
원칙을 우상적 믿음으로 바꾸면서 시작되었다. 참아버님은 청평의 묘소에 있지 않다. 참아버님은
당신이 세운 원칙과 가치 속에 살아 있다. 그 원칙과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 속에 참아버님은 부활해 계신
것이다.
예수는 혈통적 이스라엘임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일갈한다.
“저
돌들로도 이스라엘을 만들 수 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일갈했다.
“저
성전을 허물라! 내가 3일만에 다시 지을
것이다.”
<새벽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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