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것’과 ‘인간의 것’의 차이
인간이 만든 종교가 그 한계를 드러내며 몰락으로 가고 있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신의 것’일 수 있다는 믿음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인간이 만들고, 인간들이 합세해서 키워 온 한 종교의 허상은 종교를 이끌어왔던 지도자들이 드러내는 행동결과의 진정성의 한계 때문에 빠르게 금이 가고 있다. 보다 일찍이 깨어나 있던 소수들은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조용히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것’은 언제든지 ‘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인간과 신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것’이 ‘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신의 것’을 붙들고 ‘인간의 것’을 놓아야
한다. 통일교 시초 단계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놓아버리지 못한 ‘인간의 것들’로 인해서 퇴색되어 갔다.
‘신의 것’은 ‘현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현상’으로 ‘신의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며
그런 시도는 비본질적이다. 통일교 지도자의 부족함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드러내려’고 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일교를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서 신도들의 극단적인 희생의 산물인 수천억원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낭비해 왔다. 이러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통일교는 더욱 허상이 되었고, 사기가 되었다.
‘신의 것’, ‘본질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드러낼 수 없는 곳에 있다. 억지로 보여지는 현상을 창조하려는 시도는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연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사랑 또한 그러하다. 자연은, 어머니는 사랑을 인간에게 보이는 현상으로 ‘증명’하려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존재하며 자연스럽게 활동할 뿐이다.
‘신의 것’은 사랑 밖에 없다. 사랑은 교리나 헌법이 아니다. 명령하거나 의무를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은 교리나 교회 의식 보다 더 나은 인간성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어떤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 컨텐츠는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밑에서 창조된다. 경험과 체험 속에서, 그러니까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 ‘인간의 것’을 내려놓고 ‘신의 것’을 붙들며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은 삶의 경험과 체험에 함께하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 그 음성은 획일화된 교리나 강요되는 의무와 큰 차이가 있다. 그 음성은 따듯한 아이디어를 발굴한다.
인간 사회의 집단의식에서 ‘신의 의식’으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종교나 종교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가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게 좋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실천해야 한다. 그 실천이야말로 유일한 증거다. 드러내지 않고, 억지로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조용한 변화의 증거이다. 종교나 종교지도자가 할 일은 그러한 방향성을 알려주고 그리고 그러한 표본이 되어주어야 한다. ‘인간의 것’에 치장하고 굴레를 씌어서 따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지이며, 만행이다.
‘인간의 것’을 내려놓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와 훈독은 자신을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변화는 가져올 수 없다. ‘인간의 것’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는 ‘이기’에서 ‘이타’로 옮겨갈 수 없다. ‘신의 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충만할 때에야 그것은 가능하다.
‘이기’에서 ‘이타’로 옮겨지지 못한 존재성은 진화된 것이 아니다. ‘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일꾼이 될 수 없으며, 그런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지구라는 행성을 더럽히고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인간의 오류와 질병을 치유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통일교 교회 공동체의 의식은 수 십 년동안 답보상태에 놓여져 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척’만 한다.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착각만 한다.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식구를 보면서도 안타까워하는 척만 하지 자신의 것을 덜어서 도와주지는 않는다.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고 위의 눈치만 본다. ‘더 나은 것’을 계발하려고 하지 않고 ‘나쁜 식구’가 되지 않으려고만 한다.
수 십 명이라는 작은 단위의 공동체 내에서 조차 ‘나와 너’는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다. ‘위와 아래’가 구분되어 있으며, ‘아래’에 위치한 식구는 ‘위’의 역할에 참여할 수 없으며,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다.
이러한 통일교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사례를 소개한다.
아래의 사진을 주목해 주기 바란다.
이 사진 속의 주택에는 통일교 내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영적인 일을 하는 단체의 책임자로 활동해 왔다.
사진 속 주택의 구조를 살펴보자. 위쪽으로는 고급형 전원주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주택의 널찍한 마당 아래쪽에는 여러 채의 공동주택이 가로로 길게 늘어서 있다. 알고 보니, 위의 주택에는 단체의 책임자가, 아래의 공동 주택에는 그 단체에서 알게 된 식구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공동주택은 총 5채이며, 각기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에 세를 살고 있다고 했다(주변은 시골이라 세가 싼 편이다).
위의 사례는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통일교가 그동안 줄기차게 외쳐온 구호대로라면 심각한 문제가 있다. 수천 번이나 낭송하는 가정맹세 모든 단락의 맨 앞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참사랑을 중심하고....’에 전면적으로 위배된다. 더구나 그가 평식구가 아닌, 모범이 되어야 할 지도자라면 더욱 그렇다.
참사랑, 위하여 사는 삶, 공생공영주의, ‘축복’가정, 천일국 백성이라는 구호 아래에는 이처럼 ‘능력있는 자와 능력 없는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욱 더 가지려는 자와 있는 것마져 점점 잃어가는 자’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공존한다.
‘신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위와 같은 주택을 건축할 자금이 있었다면 분명히 저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섯 채를 똑 같이 지어서 아주 저렴하게, 또는 거저 주었을 것이다.
‘신의 것’은 구호 속에서 생성되지 않는다. 획일적인 교리와 창시자(인간)에 대한 맹목적 신앙 속에서 자라나지 않는다.
“통일교인의 대사회적 가치”는 증명하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뿐이다.
가치 있게 존재하지 않고서는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적 의식에서 이타적 의식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신의 것’으로만 가능하다. 종교는 신의 것이 아니다. 신의 것만이 신의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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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03. 21:01
지금의 경지(?)에 이르기 까지의 고민과 방황 남 모를 많은 수고로움이 느껴지네요.
비로소 신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계신 님의 전도에 신의 가호가 늘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비로소 신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계신 님의 전도에 신의 가호가 늘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15.06.03. 23:02
그(창시자)가 화려한 왕궁에 입주했던
그 지점이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봐야한다는 당위성이 시라지고 세상사람들처럼 번듯하게 사는것에 당위성이 부여되기 시작한 출발점은 아닌지...
식구들, 특히 간부들의 잠재적 의식 속에서.
그 지점이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봐야한다는 당위성이 시라지고 세상사람들처럼 번듯하게 사는것에 당위성이 부여되기 시작한 출발점은 아닌지...
식구들, 특히 간부들의 잠재적 의식 속에서.
아래층 세 사는 분들 월세 내지 마세요
답글삭제그러면 집주인 영웅만들고 좋은 사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집 모양이 딱히 5집의 세를 받아 내가 등극한다. 뭐 그런분위기
답글삭제힘 없는 사람 깔고 앉은 분위기 좋은 계기로 만들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