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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9일 화요일

부자연스러운러운 호칭 사용과 그 뒤에 숨겨진 강요된 복종

부자연스러운러운 호칭 사용과 그 뒤에 숨겨진 강요된 복종 
 
 




부자연스러운 호칭 사용과 그 뒤에 숨겨진 강요된 복종


세상에는 “아버지”의 호칭이 따로 있고 “어머니”의 호칭이 따로 있다.
그리고 두 분을 동시에 지칭하는 부모님이란 용어가 분명히 따로 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독일도 다 마찬가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식에 속한다.


부모님 중 어느 한 분을 지칭하거나 호칭할 때는 반드시 단수 호칭인 아버님, 또는 어머님으로 부르지
그 어떤 경우라도 복합명사인 부모님으로 호칭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먼저 작고하시고 홀어머니만 모시다가 제삿날이 돌아오면 당연히 부친의 기일이니
아버지의 제삿날이라고 하지 어느 정신 나간 자가 복합명칭인 부모님 기일이라고 하는 자가 있겠는가?

또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만 계실 때, 인사차 왔다면, 당연히
<어머님! 그 동안 별고 없었습니까?> 혹은 <어머님 저 어디에 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지,
혼자 있는 분에게 <부모님! 어쩌고저쩌고.......>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이도 나에게는 이러한 논쟁에 쐐기를 박아줄만한 참아버님과의 좋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아마 지금부터 약 20년 전 쯤 되었을까? 내가 통일재단 관리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호남 지역에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많은 집들이 무너지고 큰 피해가 났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전남교구 진도교회와 장흥교회의 A형 타입의 교회가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주저 앉았다.

당시 협회장은 김영휘회장님이었고, 재단 이사장은 문승룡회장(공식 직함은 부이사장)이셨다.
나는 이 분들의 지시로 이곳 두 지역에 쓰러진 교회의 목조 잔해를 걷어내고 지금의 새 골조 2층 교회를
신축하였던 것이다.

그후 어느날 참부모님이 계신 한남동 공간으로 불려가 참아버님께 상황보고를 드릴 기회가 있었다.
나는 여태까지 한번도 참아버님께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거나 보고를 드려 본 경험이 없었다.
엄청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넙죽 큰 절을 올리고는 "부모님께 교회 신축에 관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조심스레 가지고 간 청사진으로 된 신축교회의 도면을 펼쳤다.

그 때 아버님께서는 큰 목소리로
"아니 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구분 못하고 어찌 아버지를 보고 부모님이라고 부르느냐?" 면서
꾸지람을 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와같이 아버님께서는 상식에 맞지 아니하는 언행은 결코 용납하시지 않을 만큼 매우 예민하신 어른이셨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동네가 따로 있다.
동화책에 나오는 얘기도 아니고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연속극 얘기도 아닌 실화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동네의 구성원들이 모두 정신 나간 자들만이 살고 있는 곳은 결코 아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들이 혹은 학, 박사의 학위와 어느 정도 사회적 경제적 직위도 가지고 일반 사회생활도 곧잘 한다.

그런데 이곳 공동체에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 개인적으로는 자기 집에서도
절대로 정말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유별나고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호칭을 잘도 사용 한다.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해본다면 마치 집단체면에 걸려 격리된 환자 촌에 온 느낌이다.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우리 동네, 지금의 통일교회의 얘기이다.

작년 9월 3일(음력 8월 23일), 세기의 큰 별이시자 만 인류의 영원한 참스승이시며 참주인이신
참 아버님께서 성화하신 이후 정확한 일자는 기억하지 못하나, 어느 날 갑자기 참 어머님에 대한 호칭이
복합명칭인 참부모님으로 바뀌었다.

측근과 충신으로 들어나고 싶어 애가 탄 간부들로부터 나온 발상인지, 아니면 큰 뜻을 이어가실
참 어머님 본인으로부터 나온 말씀인지 모르지만, 심히 부자연스럽고 참으로 해괴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별 심오한 뜻이 있을 것도 없다.
물으나 마나 영계에 계신 아버님과 지상에 계신 어머님이 섭리적인 식견이나 원리적인 인식뿐 아니라
심정이 완전 완벽하게 一心, 一體, 一和, 一念을 이루었으니 모든 가치 기준이 아버님과 동일하다 하여 부르는
호칭임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어떤 경우라도 어머님 하시는 일에 섣불리 불만이나 토를 달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의 뜻도 있으리라 생각 되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억지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사리에도 맞지 않고 1인에게 쓰는 단수호칭을 2인에게 적용되는 복수호칭으로 쓴다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창피하고 낯 뜨거운 노릇이다.

어느 가정에서도 어느 국가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그리고 사회 통념상 거부감을 자아내는
용어를 씀으로 해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자 아예 작정하지 않았다면 맨 정신으로는 못 할 짓을
무엇 때문에 이질감을 주어 세상으로부터 격리 당함을 자초하려 하는가?

더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주변에는 학, 박사들이며, 내로라하는 교수들과 교권을 가진 최고위 간부들이
즐비하고 항상 대거 포진하고 있거늘 어찌된 영문인지 여기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한 마디 못하고
이상한 문화를 고착시켜 가는가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의구심이 아니라 이들의 비굴한 굴종적 자세이다.
이들에게는 학자적 양심과 신앙인으로서의 내면의 외침도 없더란 말인가?

나는 비단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부모님이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만을 꼬집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개념의 이면에 숨겨진 추하고 비 신앙적이며 세속적인 속물근성을 떠올리면서
수 십 년, 혹은 반세기 넘게 참부모님을 따라오면서 교육 받고 단련 받은 우리의 정체성과 심정문화가 고작
이것이었던가? 하는 자괴감을 함께 공유하고자 함이다.

왜냐하면, 호칭의 의도적 왜곡은 사실 판단을 그르치게 할뿐 아니라 우리들의 심정문화와 정체성을
엉뚱한 방향으로 오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19세기 프랑스의 탐미파 작가들이 주장한 학설대로
“언어는 원래 애매한 것이어서 작가의 깊은 사상이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류의 애매설(瞹眛說)로
이해할 어려운 철학적인 내용이 아니다.
초등학생들에게도 추가 설명이 필요 없는 지극히 단순한 일반적인 생활용어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찢어지게 안타까운 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바로 서야 한다 .
우리는 자아를 다듬는 신앙인이면서도 또한 섭리에 발맞추어 가는 새 역사 창건의 섭리의 역군인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고 창건하고자 하는 천일국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조화로우며
심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는 결단코 안 되는 본향의 세계인 것이다.


2013년 7월 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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