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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6일 일요일

구시대의 것들

구시대의 것들


2014.01.25. 19:27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3429       


구시대의 것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시대의 것들을 빨리 버릴수록 좋다.
현 시대가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것을 버려야할 이유는 종교 내에서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교회 내에서 변화되면 좋을 것 같은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순종, 복종’ 등의 개념이다.
순종, 복종의 개념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교회의 식구들에게 권고되었던 행동양식이었다.
그 개념은 우리 교회에서 특별히 더 강력하게 사용되었다. 그 개념 때문에 일방적인 회로의 소통과 지시가
가능했고, 지도부는 그런 점을 적극 활용해왔다. 냉정하게 보면 우리 교회는 심정문화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고, 왜곡된 순종 문화를 줄기차게 키워왔던 것이다.
 
그 순종 문화는 식구 개개인의 영적 정서적 문맹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교회 내에는 자의식이
부족한 식구와 그런 식구들이 내어놓는 재물에 의지하거나 이용하는 세력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심하게 얘기하면 그렇다. 그 문맹화를 이용하는 세력의 행동 특성에는 어떤 뚜렸한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사고와 행동의 테두리를 정해 놓고 그 범주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바로 응징하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교회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식구들을 나는 수십명이나 알고 있다. 통치자들은 아무런 신앙적
고민이나 부담 없이 마음껏 식구들에게 명령과 부담을 지운다. 그래서 그 방식은 어느새 정통성이라는
화려한 옷을 입고 더 나은 방식에 대한 고찰이 끼어들 여지를 갖지 못하게 했다.
 

‘순종, 복종’의 개념은 종교적 메시지를 악이용하려는 불순한 잠재의도를 갖고 있던 일부 기독교 교권자나
신학자들의 통치수단의 결과물 같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예수의 말씀 속에서도 순종과 복종의 개념이 크게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근본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나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속에서 순종이나 복종의 개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 개념은 겉으로는 종교의 성격과 잘 맞는 것 같아 보여도 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관계의 차원과
친밀도를 끌어내리는 낮은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개념은
다른 것으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개념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인류에게 도움이 될까?
그것은 아마도 ‘소통, 협력, 공감, 행복’ 같은 개념 같다. 열거된 이 개념들은 순종이나 복종 같은
개념에 비해서 더 활발해 보이고 확장되어진 개념 같다. 또 사회공동체를 살찌우게 할 수 있는
어떤 긍정적인 효력이 잠재되어 있는 듯하다. 순종과 복종은 마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다소 굴욕적으로 머리 숙이는 모양새가 연상되지만, 새로운 개념은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것 같다. 이 개념은 개인의 생각이나 주관을 조절하고 공동의 하모니와 가치를
만들어가는 훨씬 진보된 인간활동 같다.
 
순종과 복종은 일방성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은 쌍방성을 갖고 있다.
나라는 개념이 아니고 우리라는 성격이 강하고, 더 포괄적인 행동양식으로 보인다.
 

수 십 년 전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의 비즈니스 세계의 조직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일방성에서 쌍방성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맨 밑에 있는 하위조직의 의견도 양질의 것은
언제든 위로 전달될 수 있었으며, 그 의견들은 발의자의 직위와 상관없이 채택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기업들의 업무실적은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쌍방향 소통 방식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과 창의성 계발에 큰 효과를 가져 온 것으로 이미 다각도로 증명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 당시에 잘 나가는 회사의 오너를 인터뷰하면 대부분의 오너들이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곤 했던 것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우리 직원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게 뒷받침해 준 것 밖에는 없습니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동기가 유발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비단 기업에서만이 아닐 것이다.
나의 생각에 그래야할 필요성은 종교 내에  더 많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종교의 세계는 보이지도 않는 세계이기에 더 강력한 동기 부여가 필요한 것 아닌가?
 

오래 전부터 순종적 문화를 갖고 있던 일본 식구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교회 문화는 큰 효과를
이끌어낸 게 확실하다. 그러나 그 효과는 교회의 발전과 퇴락에 동시에 영향을 주었다. 일방성이
 가져오는 뚜렸한 한계 때문이다. 일방적 지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효과의 종류는 당연히
단조롭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생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가시적인 것, 실적 같은 것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무형의 가치와 성장은 애초부터 그러한 방식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형적인 방식은 유형적인 결과를, 무형적인 방식은 무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우주의 이치 아니겠는가? 이러한 이치 때문이었는지 우리 교회는 큰 외형만 남아서 가슴의 온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식구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종교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신앙인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재료는 무엇이며, 무엇으로 만드는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로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사랑이라는 재료는 ‘주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종교의 이름을 내걸고 끝없이 ‘요구하는 것’으로는 사랑이라는 재료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쌍방의 성질을 갖고 있다. 그것은 순종이나 굴복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
반대로 상대에게 순종하겠다는 태도이다. 준다는 태도에는 상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준다는 것은 상대를 도와주려는(협력하고 공감하려는)의지의 발로이며, 그것은 함께 행복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려는 마음은 선천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은 식구들의 그 선천적 성향을 교회 윗 쪽으로만 한정시켜서 유도했다.
그 결과, 교회의 재산은 커지고 식구들은 가난한 상태가 되었다.
물질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극빈자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다.
이것이 순종과 복종의 결과이다.
 

‘순종’과 ‘복종’을 버려라!! 라고 나는 얘기하고 싶다. 그 대신에 자발적 활동을 통한 밀도 높은
소통과 협력과 또 그 결과물을 체험해 보라. 소통할 수 있는 집단을 찾고 그 집단 내에서 공감과 협력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연습을 자주 하라. 비록 그 집단이 꼭 종교적 비젼을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한 번 적극적으로 참여해보라.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신은 종교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깨우쳐야 한다.
신은 자신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인간(자식) 보다 자신 속에 내재한 신비한 능력을 스스로 발굴하고
그리고 함께 누릴 줄 아는 인간을 더 원할 것이다.
 
종교가 뒤늦게나마 편입해야 할 것은 사회의 소통과 협력과 공감이며, 그것이 종교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며 또한 목적이기도 하다. 사회에 그러한 영향을 주고 싶어하는 신앙이라면
자신 먼저 열린 자세와 넓은 가슴을 가져야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종교적 메시지와 함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체험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참여!! 그것이 주는 천성을 계발하는 방법이며,
그 활동 안에 우리의 영적 물질적 결핍을 채워주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도 우월하지 않다.
 
 
 

(산책)

 

    

 
14.01.25. 22:13 new
참으로 좋은글입니다
순종은 .천도앞에 순종해서 나자신이
사람되고 천도에 맛는 가정을 만드는데
필요한것이지 천도를 거역하고 거짖을
일삼는 지도자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그래서는 다 망하는
길일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창조성을 갖고있기때문에
발전성있는 내용이면 어떤사람의 말에도
귀를 귀울릴줄 알아야 할것입니다
 
 
14.01.25. 22:09 new
오늘의 현실을 정 확하게 진 단 하고 있는 글이네요
가난은 슬프지않지만 심정이 식어가고 마음이 떠나가는 게 안 타깝군요
 
 
14.01.25. 23:19 new
수고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논지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가정맹세 8절의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 복종이라는 단어가 있군요.
그 "복종"이 지니는 의미는, "참사랑을 실천하라는 등의 완벽한 말씀" 에 순종하여
신인애 일체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라는 뜻이지,
단순히 교권자나 특정인에게 굴종하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퇴직을 한지 오랜 나이임에도
내공이 꽉 찬 분을 만나면 아직도 듣고 따를 것들이
많더군요.
"아버님의 큰 가르침은 영원성을 갖고 순종해야 제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귀한 글에 토를 달아봅니다.
마지막 큰글은 크게 공감합니다. 야송 이진우
 
05:15 new
동감입니다. ^ ^
사람의 창조도 흙을 빚어서 성인으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의 답은 '달걀'이 먼저라는 겁니다.
곧 성장과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코스를 이렇게 정의해주셨습니다.
'종의 종, 종, 양자, 서자, 적자,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하나님'
8단계.
인류의 거대한 문화를 이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가고있는 단계가 양자의 단계입니다.
그 양자가 되기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습니까?
역사'라는 것을 가슴으로 느껴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심장이 얼마나 새까맣게 타버렸을까 진실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 표현된
 
05:19 new
그 날 하나님께서 그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라는 표현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눈에서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오고가는 사랑의 맛을 조금이라도 느끼실 수 있으십니까? 잔치는 그런 행복함 속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만약 통일교회를 만들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면 님의 모든 지적과 모순이 100%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아닙니다. 아버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떤 오해와 핍박을 받더라도 변치않는 믿음으로 진리의 길을 가라고. 그런 길로 가기위해 얼마나 급하게 애타게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까? 사탄들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상황에서
 
05:22 new
어떻게 숨기며 어떻게 몰래 전하나하고 고민하셨겠습니까?
아버님의 섭리의 진실을 알지못하면 아버님과 하나님은 커다란 고통속에서 몸부림치시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몸부림치게 될 것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면 윗글을 쓴 사람은 좀 더 자중하여야 되리라 봅니다.
야송 이진우님! 부디 건투하시고 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05:27 new
글 쓰신 분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것은 통일교 지도부가 위하여 살 줄 모르기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봅니다.
무신론자들을 배출시키는 현 기독교 체제나 통일교 체제는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많은 생명들이 아버님께서 말씀하시는 '위하여 사는 삶'을 통해 기쁨과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소통, 협력, 공감, 행복'의 단어들이 어울리는 새천년의 시대를 열겠지요.
순종의 의미를 조직에 순종하는 것으로 오해(?)하니까 참 걱정입니다.
아버님께서 언젠가 '순종하라, 복종하라는 것은 나 문선명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도 뜻에 절대 복종한다. 나도 그렇다'라는 하시는 말씀을
 
05:31 new
내 귀로 들었습니다.
섭리는 밟아가는 길입니다. 듣고 가는 길도 아니고 말하며 가는 길도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위대하심은 바로 말씀하시기 전에 섭리의 가시밭길을 밟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지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우리가 아버님을 잘 알지 못하였음을 돌아보고
지금이라도 조직 문화의 잘못된 점을 하나씩 님이 지적하셨듯이 고쳐나간다면 아버님께서도 해방을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해방, 아버님 해방은 곧 나의 해방이요 우리의 해방이 될 것입니다.
곧 사랑의 해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할 사람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지요.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우리는 행복
 
05:37 new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이기에 그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 하나님도 우리를 마음껏 사랑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우리가 그의 선한 남자가 되고 선한 여자가 된다면 참으로 보시기에 좋은 우리들을 그분이 사랑하지 않을래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희열을 선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님의 말씀처럼 조직이 욕심을 내려놓고 아버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선한 길로 이끌기를 바랍니다.
식구들을 짐짝이나 현금인출기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저 썩어빠진 거머리들이나 구더기들이 제거될 날을 저도 기다립
 
 
05:46 new
참으로 깊은의미가 담긴 좋은 글입니다.
 
 
06:08 new
한가지! 예수님에게서 '순종, 복종'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그들은 목숨을 불구덩이 속에, 기름가마 속에 사자의 입속에 던지면서도 순종, 복종했습니다.
그러면서 순종을 요구하고 복종을 요구한다고 불평 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님의 글이 불평이나 불만이 아닌 진정 아버님을 사랑하는 건의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썩은 부위는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도려내어지거나 죽어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도려냄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습니다만 자칫 잘못하면 생살을 건드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생명이 삽니다.
그러나 반드시 도려내어야 할 명제입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말입니다.
의로운 길은 하늘이 동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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