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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6일 금요일

천하에 미련한 인간들...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2016.05.05. 16:51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9026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복잡다단(複雜多端)하고 다양한 세상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경험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경험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이 경험한 것을 말이나 글, 그리고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서 하게 되는 간접경험이다.
 
간접경험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얻어진 정보를 가지고 추정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직접경험한 내용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을 보면서 자식의 입장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은 이럴 것이다 라고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이나 정확한 것은 부모의 입장에 섰을 때 비로소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을 소설이나 영화로 아무리 본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사랑에 빠져 보지 않으면 아무리 소설이나 영화의 감정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감정을 느껴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제(齊)나라의 환공(桓公)(보통 제환공으로 부르며 제일 먼저 전국시대에 패왕이 되었다)이 수레를 타고 가다가 수레바퀴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게 되어서 수레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제환공이 글을 읽고 있노라니 목수 윤편(輪扁)이 일을 멈추고 올라왔다.
‘그 책에는 대관절 어떤 것들이 씌어져 있습니까?’
‘이거 말이냐. 이건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까?’
‘아니다. 옛날 분으로 지금은 살아 계시지 않는다.’
‘그러시다면 거기에 씌어진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 같은 것이군요.’
 
‘찌꺼기라고? 목수인 네가 무얼 안다고 여러 소리를 하느냐. 이유가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소인은 그저 오랜 생활의 경험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수레바퀴 축의 구멍은 너무 크게 깎아도 못쓰고 너무 작게 깎아도 안 되는 법입니다. 굴대(샤프트)와 구멍이 꼭 들어맞아야 하는데 이것은 호흡을 잘 맞추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말로써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또 절대로 우연히 맞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소인이 자식에게 그 비결을 깨치게 해주려고 하나 좀처럼 잘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이 일흔이 되도록 여지 껏 이 일을 소인이 직접 하고 있습니다. 옛사람들도 참으로 중요한 대목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채 죽어버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임금께서 읽고 계신 책도 옛사람의 찌꺼기 같은 것임에 틀림이 없을 줄 아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글만 읽어서 어찌 그 사람이 깨달은 것을 깨닫겠습니까?’
 
제환공이 수레공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장자(莊子)의 외편(外篇)에 있는 윤편(輪扁)의 내용으로 제환공과 수레공이라는 이야기다. 이 내용은 너무나 유명해서 많이 인용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내용들이다.
 
내가 친한 사람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가 불교에 귀의해서 조그만 불당을 차려놓고 기도도 해 주고 영도 분립시켜 주는 법사(法師)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나와 친하게 된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불교와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해 주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자신의 외가 쪽에서 불교와 인연을 많이 맺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 자신의 집에 탁발을 하러 온 스님이 이 사람을 보고 불교 와 인연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 했는데 온 집안이 다 기독교 집안이다가 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기도하는 중에 불교방언이 터지면서 석가모니가 도를 깨우치던 모습을 보게 되면서 불교에 귀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20대 중반에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가정이 있었지만 불교 교리에 정진하고 기도생활을 많이 하면서 영적으로도 밝아지게 되어 구명시식(救命施食)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법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머리도 깍지 않고 평범한 일반인들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그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인 줄을 모른다.
이 사람이 이런 단계까지 가게 된 것은 소위 조상들의 공적도 있었지만 본인이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높은 도력의 경지에 다다랐을 것이다.
 
내가 그 사람과 상대기준이 되어서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정신세계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노력을 해서 도달한 수준의 것이기 때문에 나도 그런 수행이나 기도의 노력을 해서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그 수준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 사람과 할 수 있는 대화의 내용은 지적인 부분에 한정되는 것이며 도의 수준에서 깨닫고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대화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교리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 보다는 인간의 영성(靈性)을 깨우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는 그런 것을 가르치고 수련하여 그렇게 되도록 하는 곳이고..
 
성서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아버님의 말씀 그리고 누구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수레공의 말처럼 그 사람들의 생각의 찌거기이다.
안 읽는 보다는 낫겠지만 말씀을 골백번 읽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리고 더 가관(可觀)인 것은 그런 말씀을 해석한답시고 내가 해석하는 것이 맞네 아니데 하는 것이다.
 
소위 성인들의 말씀이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설령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에 맞는 말로 현대에는 맞지 않는 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성인들은 어디까지나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로서 더 높은 영적 수준의 사람들이며 내가 살아가면서 나의 영성(靈性)을 높이는데 참고에 필요할 뿐이다.
 
예로서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나의 영성을 높여주는 것도 아니고 나를 천국으로 손잡고 데리고 갈 것도 아니다.
말씀을 읽고 그렇구나 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참고(參考)를 하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는가?
 
성서나 원리나 아버님의 말씀이나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참고서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섭리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섭리는 성서나 원리 말씀으로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意志)와 행동으로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말씀이나 경전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영성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기도나 묵상 수생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영성이 개발되는 것이다.
 
수학문제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수학실력은 늘지 않는다.
수학실력을 높이는 방법은 오직 풀어 보는 것밖에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가 아니라 말씀에 목을 메는 인간들치고 영성이 제대로 개발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익명방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나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댓글 2개:

  1. 참아버님은 메시야 구세주가 아니고 지도자 수준이다. 그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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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마디로 구역질나는 글이다. ㅁㅊ넘의 넋빠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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