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교회의 외양이 세계로 확대되면서 문선생님은 과중한 업무를 소화해야했다. 그 당시에 종교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워진 마스터플랜의 기본 방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신권복귀, 한반도 통일이었다. 그 당시의 문선생님은 ‘외형적 조건을 확보하면 자동으로 신의 나라가 된다’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외형적 조건을 먼저 확보하고 나서 그 후에 내적인 면은 천천히 만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문선생님은 외적 세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협회를 통해서 목회자와 식구들에게 의무와 책무를 지시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문선생님은 실적이나 업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회사가 직원들의 부서를 수시로 조정하는 것처럼 목회자나 공직자들을 마음대로 이리저리 이동배치하였다.
교회 내에서 영적인 신앙 형태는 1980년대부터 점차 사라졌다. 교회 내의 신앙적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신과의 교류를 도모하는 형태에서 보이는 문선생님과의 관계를 확대하는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영적 성장과 사랑을 키워가는 형태에서 어떤 보이는 목표에 시선과 집중이 옮겨간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는 문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신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러한 신앙 형식에 문제 제기를 하는 식구는 이제까지 거의 없었다. 나 역시 몇 년 전 신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런 현상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었다.
문선생님은 실로 많은 말씀을 내어놓으셨다. 하지만 실제로 선택해 온 일들은 그가 창설한 수많은 단체를 통한 외적 세력확장이었다. 교회 식구들에게 내려 온 의무와 책임은 대부분 전도, 인원 동원, 헌금 같은 것이고 그 활동의 중심 목적은 세력 확장이다. 우리 교회가 세력확장을 신의 나라를 주도적으로 신속하게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방식은 신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나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수십년간의 노력과 거대한 자원투입의 결과가 어떠한지 우리는 현재 확실하게 목도하고 있다.
그러면 왜 종교의 세력확장이 신의 나라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본질적인 입장에서 보면 세력확장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닌, 인위적이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세력확장은 종교의 본질이 전혀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결과세계인 외적 환경 변화가 아닌, 주체적이고 근원의 세계인 내적인 변화다. 그리고 특정한 이론과 이념을 아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고 존재 자체의 변화에까지 이르러야하는 것이다.
이전에 게재한 ‘문선명 선생님과 지도자들에 대한 이해’의 글에서 얘기한 대로 우주는 인간이 원하는 것만을 준다. 여러 생각들과 관심 사항 중에서도 중점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우주도 선택한다(지원한다). 외적인 것에 집중하면 외적인 결과를 준다. 외적인 것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내면의 성숙과 깨달음을 동시에 주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이 면을 문선생님과 지도자들이 착각한 거 같다. 나는 계속해서 교회를 출석해왔기 때문에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다. 협회가 식구들의 내면 성숙과 깨달음을 촉진시키기 위해 그 목적에 맞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콘텐츠를 제공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훈독회, 조상회원식, 말씀 듣기, 수련 같은 방법들이 있었지만, 그런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방법으로는 내적 성숙(내면 치유나 정화 등의 총칭)이나 깨달음을 얻기는 어렵다. 내적 성숙이나 깨달음은 교회 최고 지도자인 문선생님과 그 이하 다른 지도자들이 총력을 기울여서 활동의 중심 포커스를 가졌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내적 성숙의 목표라고 할까, 그 결과는 사랑이며 의식의 향상이다. 그것은 좋은 지도자를 막연히 따라가며 지도자의 지시에 순종하여 협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깊고 깊은 수행을 통해서 내면에 숨겨져 있는 신성(신적 자아)을 발견하는 활동이다. 상처받은 자아를 치료하고, 찌들어 있는 온갖 오류를 정화해나가는 작업이다. 삶을 사랑하고 삶에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과 사물에 놓여져 있는 신의 배려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신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확대해나가고 정상화시켜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의식이 향상되면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이상적인 패턴의 행동양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이미 종교를 넘어선 것이며 소박하고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더불어 창조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선생님이 세운 지도자들 중에는 평범한 수준의 의식마져도 결여되어 있어서 식구들의 내면을 치유하고 성장시키기는 커녕 큰 상처를 주고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외적인 목적과 목표에 치중했던 교회 문화 때문에 생긴 부작용들이다.
(내면 치유(힐링)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며,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 교회가 사람의 내면을 치유하고 의식을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 모델이나 콘텐츠를 1980년대에 개발했다면 지금쯤 전세계에 큰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다. 단월드 명상센터는 전국에 300개의 센터와 10만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신이 없어진 이유 2. 신을 가로 막았다
종교지도자의 가장 큰 책무는 지금까지 인간이 범접하기 여려웠던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에 인류를 접속시켜주는 일이다. 이때, 지도자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가이드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면 결국 본질은 없어지고 방향은 빗나가게 된다. 그러니까 우주는 없어지고 본인(종교지도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가이드란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악산 관광을 예로 들면, 가이드는 설악산을 관광객들에게 안내하는 안내자이면서 또한 함께 관광하는 관광객이 된다.
가이드는 설악산 자체가 될 수 없다. 관광객은 설악산을 보러 온 것이지 가이드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가이드가 아무리 설악산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설악산 자체에 비할 수는 없다. 설악산을 감상하는 방법과 느낌의 크기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며, 그것은 철저히 관광객의 몫이다. 가이드는 거기에 더 이상 끼어들 수 없으며 끼어들어서도 안 된다.
“ 내 말씀만 봉독해라!!”1980년대의 어느 시점에 이러한 명령이 협회로부터 떨어졌다. 이때부터 목회자의 설교는 문선생님 말씀을 발췌해서 봉독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 의도는 매우 독재적이며 편협하다.
그것은 목회자와 식구들을 무시한 처사다. 목회자와 식구 개인의 신과의 접속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조치이다. 기도와 삶을 통한 영감을 나눌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목회자와 식구들의 신앙적 수준은 신과 아무것도 교류할 수 없다고 단정한 것이며 무시한 것이다. 이것은 신의 입장과 바램에 역행한다. 신은 인간을 믿어주며 격려한다. 수많은 방법으로 인간에게 다가가며 말을 건다. 문선생님은 식구들에게 신을 안내하는 게 아니고 신과의 접촉을 단절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을 세운 것이다.
문선생님은 분명히 독재의 방식을 가졌다(선택했다). 그 방식은 한 번도 변동되지 않았다. 자신의 2세에게 모든 권한을 물려주는 것으로 독재를 완성시켰다. 독재 자체가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결정적 증거이며, 신도들이 존중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독재는 신도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데 용이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신도들을 도구화시키고 한 쪽으로 몰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는 독재의 방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우상화에 성공했고 손쉽게 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애초에 종교라는 속성으로는 신을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종교의 이름, 종교의 교리, 종교의 의식, 종교지도자의 인간적 한계 등은 신을 만나는 통로가 아니고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된 종교적 속성들은 인간의 오염물이 적지 않게 묻어있다. 잘못되었거나 편협한 방식, 제한된 인식체계가 들어 있다.
신은 신으로만 인도할 수 있다. 그 말이 무엇인가? 인간 개인의 내면에 있는 신을 통해서 인도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깨달은 스승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스스로의 내면을 찾아가라고 권고한다. 스승 자신이 인도자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성철 스님은 강의 도중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지금 강의를 듣는 중들 중에서 쓸만한 놈이 있다면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뭔 말이 그렇게 많으냐?’하고”. 크리슈나무르티도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말씀의 본질을 스스로 찾으려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따르려 한다고 하면서 1만명이 넘는 단체를 갑자기 해체시켜 버렸다.
깨달은 사람들은 수십권의 저서와 방대한 말씀을 내어놓으면서도 우주(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신을 낮춘다. 그들은 고백한다. “나의 깨달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있는 것을 일부 설명했을 뿐이다.”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그대들은 이미 완전하다.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대들은 신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차원높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100여 년부터 활동해왔으며 현시대에 와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근래에 와서 평범한 사람들이 신의 영감을 받고 갑자기 깨달아서 신의 속성을 자세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확인한다. 나도 그런 사람들을 여럿 만나 보았다. 신의 속성을 어느 정도 알고 실감하는 사람의 경우, 인간이 신을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 위에 더 높은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실감한다). 그들이 문선생님의 말- 즉, 자신이 만왕의 왕이며, 재림주이며, 영계를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신이 없어진 이유 3. 깨달음의 한계
머지않아서 우리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선생님이 내어놓은 자료들이 뛰어난 면이 있지만 그것은 본질의 세계의 극히 일부이며, 그 일부도 선생님의 창작품이 아닌 본래 있는 것을 재구성해서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의 위대함은 그런 자료들이 아니고 신과 인류를 사랑한 그 마음과 노력에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의 그런 위대함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깨달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앞으로 더 진전해야 할 것이다.
깨달음 부족 현상- 종교를 못 넘어섰다
종교의 테두리는 깨달음의 입문 과정에서 누구나 쉽게 넘어선다. 우주를 인간의 졸렬한 조작물인 종교 안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이유를 아는 데에는 그리 높은 깨달음이 필요치 않다. 종교 지도자의 인간적 한계 속에서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가 드러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으며 나눌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이러한 면에서 김수환 추기경이나 현 교황이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한 것은 그나마 조금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는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우리의 축복을 받아야한다고 고집해 오고 있다.
신의 활동은 종교 밖에서 더 활발하다. 갈 길을 잃은 가엾은 사람에게 신은 더 집중한다. 그러나 종교인은 갈 길을 잃은 게 아니고 닫혀진 길을 스스로 고집하기에 신이 함께하기 어렵다.
우리가 종교의 본질을 알았다면 훈독회를 하거나 훈독회에 사람들을 끌고 오려고 종용할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에게 신의 마음과 사랑과 능력을 갖고 찾아갔어야 했다. 위로하고 격려하며 공감하고 사랑해주었어야 했다. 그들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이러한 활동을 열심히 해 온 사람은 새롭게 깨닫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사람들을 제대로 도와주려면 먼저 종교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다가가고 공감해 주려면 스스로가 보편성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보편성이라는 통로를 통해서만이 사랑과 치유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 부족 현상 - 지상천국 실현의 반복된 예고와 연장
문선생님은 지상천국 실현 시기를 여러 번 선포했다. 그리고 막상 그 시기가 도래하면 식구들을 탓하면서 연장기간을 발표했다. 그렇게 예고와 연장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오늘까지 지상천국의 완성은커녕 기본 토대조차 되어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일부 맹신자들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못해서 그렇다’라든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부연설명을 할 것이다.
문선생님의 그 예고(약속)는 개인의 꿈(이상)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문선생님의 말씀은 현재 이곳은 지옥이며 본인이 식구들과 함께 지상천국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들의 생각은 이와 크게 다르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 우주를 천국이라고 말한다. 완전하다고 말한다. 인간 역시 악마가 아니라 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은 없는 천국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천국임을 깨닫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자신을 완성시켜서 천국인이 되는 게 아니고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을 회복하는 것이다(천국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요즈음 본격적으로 위와 같은 메시지를 내어놓고 있는 추세다.
(다음에 계속....다음 주제는 ‘새로운 종교’)
즉 본(本)=체(體)란 말인데,
이 말은 결국은
본문 글에 나오는 “문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신을 대신”하였다는 말도 되는데?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본문 글에서는 "문선생님이 신을 가로 막았다"라는 말도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본체론과 관련해서 문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즉 본(本)=체(體)란 말인데,
그렇다면 “문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신을 대신”하였다는 말도 되는데,
이에 공감한다는 말인가?
실명이고 비실명이고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의 본질이 중요하고 내용이 중하다고 봅니다.
통일교의 민주화를 위해 매우 좋은 글이라고 봅니다.
왜 굳이 실명,비실명 같은 굴레를 덧 씌워야 합니까?
글을 읽어 본사람으로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본글의 집필자께서는 세계종교들의 절반만 생각을 하고 계시는 듯........
형상(形狀)은 어떻게 보면 우주 자체를 말한다고 할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에서 공색(空色)으로 볼때,
통일교의 형상(形狀)은 불교의 색(色)이 될수 있고,
불교의 이색(色)은 대일여래( 大日如來)이라고 하여
"우주 자체가 여래"라는 말 입니다.
이 말을 통일교 원리강론으로 하면 "형상의 하나님"이 되고,
형상의 하나님은 우주 자체를 나타낸다고 볼수도 있을 것 입니다.
이 경우 물론 불교의 공(空)은 통일교 원리강론의 성상(性相)
즉 "성상의 하나님"으로 빗댈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도 식구중 한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뱃속에 들어있다"고 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 뱃속이란 우주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우주 안에 들어 있다는 말씀 입니다.
이런 의미는 결국은 "우주가 신"이란 말이 됩니다.
통일교라는 종교조직에 대한 것보다,
이런 본질에 대한 글이 올라와야 한다고 봅니다.
본질에 비한다면 통일교란 종교는 형식이나 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 입니다.
통일교란 물량(物量)이 아니고
통일교란 이름이 아니고,
통일교란 형식이 아니고,
통일교란 껍데기가 아니고,
본질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답글을 올린 사람입니다.
연락 하고 싶습니다.
부탁 합니다.
mujin3@hanmail.net
공감하며 사실 120프로 적중한 진단입니다.
님이 보신 그 시선이 정상적인 시선일 겁니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달리해 보시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통일교회에 언제부터 입교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순을 이제사 깨달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깨달았던 것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이제사 깨달았다면 깨달음이 좀 늦은 감이 있고
그 전부터 깨달았다면 위선자의 길을 택하셨다는 마음입니다.
왜 위선자의 길을 택하였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지금 어떤 길을 가려고 하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무척.
저의 깨달음은 4년 정도 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깨달았다는 의미는
그동안의 오류와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자아을 개선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요.
위선도 마찬가지이구요.
하고 싶은 일은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밑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것입니다. 준비중에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속에 아버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맹종 스타일이다.
조직을 빠져나올 수 없어서 그냥 지옥으로 간다고 해도 어쩔꺼야~ 아버님 책임이지 우리 잘못 없어~한다.
아버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모두들 원망이 가득하다. 참..
그 원망을 숨기며 살다니..
아버님 불쌍하시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마음 고생의 험난한 길이셨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길을 가셨다.
아버님, 언젠가는 저들도 당신의 심정을 알 날도 오겠지요.
문제는 저들이 별 진지하지 않고 알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열어놓지 않고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영혼을 한자리에 매달아 놓고
계속 상대방을 향해 "네 탓이야, 이것도 네 탓, 저것도 네 탓이야"한다.
아버님이 누구에게 명령을 하되 그 명령의 이행여부는 각자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게 될 때는 자신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독재자라는 표현은 정치권의 욕망을 나타내는 용어에 가깝다.
종교인에게는 어울리는 않는 표현이다.
하나님처럼 독재자가 어디 있는가?
완전무결한 독재자가 아닌가?
예수님도 그렇다.
'부모, 형제 세상 그 누구보다 무엇보다 더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선포하셨다.
그런 독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제가 발견하고 체험한 하나님은 독재하고는 정반대입니다.
그리고....부족한 사람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느냐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책임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중요하다고 봅니다.
댓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