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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인간답게 살지 못하면서 용서와 은사가 무슨 소용인가

인간답게 살지 못하면서 용서와 은사가 무슨 소용인가


2013.09.20. 10:58 http://cafe.daum.net/W-CARPKorea/cSkJ/22272

 
우리가 살면서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누구나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세상을 좀 산 사람들은 알지만 그것이 생각대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삶에서 어떤 계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아는 것과 체감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통계적이나 확률적으로 아는 것들.......
예를 들면 30년 안에는 어떤 가정이라도 자족 중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다친다는 것이 통계적 수치이나, 그것이 우리 가족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으면 전혀 그것을 실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통계나 확률처럼 불확실한 것이 아니고 확정된 사실이지만 그것이 언제라고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다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살아간다.
만약 그 때, 곧 언제라는 때가 막연한 것이 아니고, 그 시각을 자신이 아는 시각이라면 살아가는 방법과 자세가 달라질 것이 아니겠는가...
 
소설이나 현실에서 보면 평생을 악하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비로소 자신이 잘못 산 인생을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악인이 선인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으면서 그럴 자격도 없지만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게 된다.
선한 사람이 죽으면서 악한 마음을 먹으면서 죽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왜 악한 사람은 죽으면서 선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 사람들이 많은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후회하고 선한 마음을 품고 죽으면 다 용서가 되는 것인가?
 
악했던 사람이 죽을 때 선해 지는 것은 사람은 선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천리(天理)이기 때문에 죽을 때 가서야 그것을 깨닫거나 본능이 그렇게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그것을 알고 죽는 사람이 조금 낫기는 하겠지만 처음부터 악하게 살지 않은 사람과 비교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평생 악하게 살았던 사람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회개를 하고 새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된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이 그 전에 살면서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는 간과를 하는데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분명 악인이 회개를 하고 선인이 되었으니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그의 주변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사람의 인생에도 켜켜이 쌓여 있다.
그 흔적은 회심(悔心)을 하는 순간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신이나 다른 인간의 용서와 상관없이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마치 나무에 상처를 내면 그 상처가 아문다 하더라도 그 흔적은 영원히 남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망나니 같은 자식이 있어서 어머니의 속을 지지리도 썩게 해 드린 것들은 나중에 철이 들어 그것이 불효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늙어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상처와 그런 기억은 애당초부터 없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선하게 산 사람과 악하게 살다가 선한 사람으로 바뀐 사람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처음부터 선량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 것은 종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회개하는 순간에 지난날의 잘못된 모든 것들은 다 치유되고 용서되었으며 그리고 회복이 된 것처럼 그 당사자와 세상 사람들에게 주장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신이 용서를 하는 부분은 어차피 신은 부모와 같은 입장에 있는 분이니 처음부터 용서를 하고 말 것도 없다....
아무리 망나니 같은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부모는 그 자식을 용서하는데 신은 어떤 인간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생을 즐겁게(?)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를 하면 다 용서가 되기 때문에 아직은 즐겁게 살겠다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종교계의 자세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기독교인(천주교, 개신교)들은 매주 교회에 가서 회개의 시간을 갖는다.
그 회개의 시간이 지난 한 주를 잘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는 약속의 시간도 되겠지만, 그 시간 중에는 지난주와 같은 잘못에 대한 회개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회개를 한다고 해서 무슨 용서가 되겠는가?
 
신과 인간 사이에는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고의 관계가 없을 것이다.
용서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지난 잘못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마음을 쓰기 말고 앞으로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격려의 의미일 것이다.
 
우리교회도 많은 사면이 이루어 졌었다.
그 사면의 뜻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면을 한다고 해서 과거의 잘못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 기억이 흔적이 어떻게 지워지겠는가?
어차피 고칠 수 없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미래를 망치지 말고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살게 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아간다.
그 중에는 불가피하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다.
가족들 간에도 상처를 주고받고 사는데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보면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없겠는가마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양심을 속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이다.
그것은 아무리 상처가 치유가 된다고 흔적으로 남게 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고 살아가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 부분을 간과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 부분이 어떤 부분인가 하면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죄의 범위와 비종교인이 생각하는 죄의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들은 공동생활이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행위를 죄라고 규정한다면 종교에서 규정하는 죄는 범위가 더 넓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까지를 죄의 범위로 규정해 놓았다.
 
종교에서 규정하는 죄들은 인간이 숨을 쉬면서 살아가면 무조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을 어찌 다 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 중에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도 많고 해야 될 것 중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종교에서 죄로 규정한 것들은 인간들이 지킬 필요도 지킬 수도 없는 것들로 현실과는 맞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교회에서 규정하는 죄는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 말은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면 죄가 된다는 것이니 어떤 것이 인간다운 것인지는 각자 생각해 볼 것이며, 지금까지 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들 중에 어떤 것이 죄가 아닌가도 생각해볼 일이다.
 
죄, 회개, 용서, 등 등....
이런 용어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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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5년 9월에 썼던 글이다.
우리 교회와 관련된 아래 단락은 지금 추가한 부분으로 기성교회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퇴행의 길을 걷는 교회와 식구들이 너무 한심해서이다.
 
청평에서 은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보다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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