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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6일 수요일

우리는 부자(父子)의 관계보다는 주군(主君)과 가신(家臣)의 관계는 아니었을까?



가신(家臣)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主君)을 위해서 충성을 다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적인 관계 때문이라기보다는 주군에 의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충성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부하와 상관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면 전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씨와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장세동씨가 전두환씨의 몰락 이후에도 자신의 상관이었던 전두환씨에게 끝까지 충성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 두 사람의 다 같은 공무원이었지만 주군과 가신의 관계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을 그들이 보여준 내용들이 주군과 가신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내용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군과 가신의 관계라면 그 관계가 끝이 나면 사실 더 이상 충성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충성을 했다는 것은 주군과 가신의 관계로 인간적인 관계가 물질적인 관계보다 우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축복가정과 참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그 관계를 부자의 관계로 설정을 하였고 그렇게 믿어왔었고 그렇게 살아왔었다.
어떤 관계에서 그렇게 믿고 살아온다는 것은 진정한 관계가 될 수가 없다.
그렇게 믿어온 것이지 정말 그런 관계였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구태여 말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참부모님과 축복가정들의 관계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이지 혈육의 부모와는 다른 관계이다.
그러기 때문에 혈연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그런 내용들이 있었는가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혹시 부자의 관계보다는 군신(君臣)의 관계가 우선이 되어서 부자의 관계는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
군신의 관계가 우선이 되는 것은 섭리라는 공동목표 때문에 그 섭리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명령이나 지시를 받고 그 명령이나 지시를 수행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는 군신(君臣)의 관계나 주군(主君)이나 가신(家臣)의 관계가 되기 십상이며 그런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참부모님을 인류의 부모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어 왔었다.
그러면 정말로 인류의 참부모의 입장에서 인류를 부모의 입장에서 대해 왔는지, 그리고 혈육의 부모 이상으로 축복가정들을 대해왔었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본인이 생각해 보았을 때 인류를 대하는 것이나 자신에게 대하는 것이나 정말 그렇게 대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자관계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자의 관계가 아닌 군신의 관계가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 자신의 잘못일 수도 있겠지만 실지로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면 부자관계라고 믿어 온 것은 자신만의 생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부자관계는 책임도 공유를 하고 그 성공의 열매도 공유를 하게 된다.
상속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신의 관계 곧 주군과 가신의 관계는 공유라는 것이 없다. 상속의 관계가 아닌 고용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주군의 것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축복가정들과 참부모와 참가정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립해 볼 필요가 있다.
통일교회의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들은 누구의 명의로 되어 있는가를 살펴 보는 것과 그 재산의 이익에 대한 향유를 누가 하고 있는지...
누구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축복가정들이나 식구들을 위한 몫은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그런 것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 있는지....

우리가 충성을 했던 목적은 두 가지였었다.
나를 거듭나게 하여 주어서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보다 더 섬기고 가까이 했지 않는가?

그리고 두 번째로 인류를 위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드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
실패를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 일은 실패로 끝났고 이제는 그럴 능력도 그럴 정염(情炎)도 그럴 의지(意志)도 그럴 방법(方法)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원죄를 청산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받았는가?
천박하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결론은 그런 것이다.
말씀이나 원리를 통해서 완성한 인간이 되면 그런 결과가 오는 것 아닌가?
과정에 대해서 중요성을 말하고 싶겠지만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면 끝까지 남아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의 이유인 그런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는가?
만약 구체적으로 생각해 봤다면 아마도 벌써 교회와 바이바이를 했을 것이다.
총론만 주장하였지 실현방법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위하여 사는 삶을 살면 그런 세상은 이루어지는 것이 맞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데 그 것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원리나 말씀만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고 헛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호랑이가 풀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본래 모든 생물체는 남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부모는 자식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식은 또 다른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처음의 내용은 불확실한 것이며 두 번의 내용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대로 될 것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부족한 자신을 영생을 얻게 해 주심과 이런 보람된 일이 동참시켜 준 것에 감사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의 결론은 현실이 대변하게 되어 있다.
현재의 이런 모습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심정이나 원리와는 상관이 없는 모습이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참부모님이 있다.
누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전쟁의 책임은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축복가정 중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람있었던 인생이며 자랑스러웠더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나 자손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만약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현실에 적응이 불가능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통일교회의 축복가정이라는 것을 세상 앞에 이야기 하지 못한다.
이상이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나타난 결과가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런 상황이 참담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며 그래서 떠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해서 누구 때문이라는 원망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는 나름대로 깨우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전혀 깨우침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서 많은 착각을 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것도 자업자득일 것이다.
자신은 부자관계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지만 실지로 자신의 생활은 주군과 가신의 관계로 살아오지 않았나도 한 번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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